양 당이 '개혁공천'이란 명분으로 부정·비리 연루자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등 선명성 경쟁을 펼치면서 당에 남아있는 김대중(DJ·동교동계) 전 대통령계와 김영삼(YS·상도동계) 전 대통령계의 마지막 '수족'들마저 물갈이 대상에 오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동교동·상도동의 전설이 서서히 소멸되는 느낌이다.
군부의 개발독재 시대에 분연히 맞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결국 정권까지 거머쥐었던 그들이 각 당의 개혁 공천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정치 뒤안길로 내몰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동교동계의 경우 DJ의 차남인 홍업씨가 비리·부정 전력자로 분류돼 지난 5일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으로 통했던 박지원 전 비서실장 역시 홍업씨와 나란히 탈락자 명단에 포함됐다. 두 사람 모두 부정부패에 연루돼 낙마했다. 홍업씨의 경우 기업체로부터 각종 이권 청탁으로 25억원,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원을 받은 뒤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 벌금 4억원의 형을 받았고, 박 전 실장은 SK그룹과 금호그룹으로부터 각각 7천만원, 3천만원을 받아 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3년에 추징금 1억원의 형을 확정받고 최근 복권됐다.
이번 공천에서 배제된 신계륜 민주당 사무총장과 동교동계 비서실 출신의 설훈 전 의원도 같은 케이스다.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대표는 이번 총선 출마를 위해 입당은 했지만 아예 공천 신청을 하지 않았고, 동교동계의 맏형인 권노갑 전 고문은 정치권에서 발을 뺀 채 최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 등의 연설문 번역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몰락한 동교동계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당의 이같은 '수족 자르기'에 DJ측은 적잖게 당황하는 눈치다.
홍업씨는 "나보다 아버지의 상처가 클 것"이라고 말했고, 박 전 실장은 "할 말이 없다. 주변과 상의하겠다"고 했다.
DJ측의 한 인사는 "민주당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이런 식으로 하면 민주당은 호남에서 정치적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YS 측근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전 의원은 한나라당이 입당을 불허해 공천 신청 자체를 하지 못했다.
범 민주계인 이규택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후보 당시 공보 상임특보를 맡았던 이범관 변호사에게 밀려났다.
역시 YS 비서실장 출신인 김덕룡 의원도 본인의 비리는 아니지만 부인이 공천헌금을 받았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전력이 있어 낙마 위기에서 초조해하고 있고, YS의 품을 떠나 박근혜 전 대표계로 배를 갈아탄 김무성 의원도 벌금형을 받은 전력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주류였던 이들이 이젠 공천을 걱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원로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이미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YS정권 당시 민주계를 총괄했던 강삼재 전 의원은 한나라당의 거부로 자유선진당에 몸을 담아 이번 총선에서 재기를 꿈꾸고 있는 정도다.
자신의 가신들이 잇달아 총선 공천에서 낙마하자 YS의 심기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YS는 지난 7일 한승수 국무총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지난 1년4개월동안 모든 힘을 다해 이명박 대통령을 밀었고 잘해 주기를 바란다"며 "잘할 것이라고 믿지만 요즘 너무 복잡하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로써 이미 간판을 내린 자민련의 김종필(JP) 전 총재까지 더하면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3김 시대의 종언은 YS, DJ, JP가 대한민국 정치사에 등장한 이후 40여년만에 이뤄지는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와 반(反)민주 구도라는 한국 정치의 큰 틀이 사라짐과 동시에 한국 정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뒤바뀔 것이라는 게 이번 총선의 또다른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18대 총선 공천심사 분위기는 철저히 실용 위주로 흐르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박재승 변호사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칼'을 쥐어줌으로써 'DJ당'이라는 색깔을 희석시키고 있고, 한나라당 역시 당의 정체성을 중도 보수로 스펙트럼을 확대하면서 당의 노선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3김 정치'의 유산이 아직 한나라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당 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각 당은 인적 쇄신을 통한 끊임없는 변화로 40년간 이어져온 계보 정치의 청산에 들어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8대 총선은 우리 정치사의 양대 산맥이었던 두 진영의 계파정치의 몰락을 의미하는 선거로 기록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