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가 어울린 도시의 중심이지만 1931년 샘골학원에 최용신선생이 등장할 당시는 어업과 농사가 생업이던 척박했던 곳, 그러나 메마르고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문맹 퇴치를 통한 독립에의 꿈은 키워지고 있었다. /조형기 편집위원·hyungphoto@naver.com
 
 
# 상록수마을에 이는 배움의 바람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했던가. 온 국토가 그랬지만 특히 경기지역은 어느 곳에 대입해도 될 만큼 개발과 변화가 많았던 곳이다. 그 가운데 전통마을들은 갈가리 찢겼고, 주민들의 삶 또한 많은 변화를 거쳤다. 그런데 안산시 본오동은 벽해상전이 된 곳이라고 하겠다. 파도가 넘실대던 조용한 포구가 대단위 택지로 변했으니. 일리, 이리, 삼리, 사리, 그리고 본오리라고 부르던 일대가 완전히 달라져서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래도 한 때는 수인선 협궤열차가 지나고, 사리횟집촌에서 철따라 생선회를 즐기기도 했건만 이제는 상가에 띄엄띄엄 든 횟집에서나 그 흔적을 본다. 다른 도시 횟집과 같아진 것이다.

당시의 수원군 반월면 사리 샘골(泉谷)에 교회가 들어선지 어언 백여년, 반은 농사 짓고 반은 고기잡이 하며 살던 시골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1929년부터 샘골교회에 샘골학원을 차려 어린이들을 가르친다. 국민 열에 여덟은 문맹자였던 시대 나라를 빼앗긴 무지로 부터 하루빨리 벗어나는 일만이 독립을 이루는 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마을 변화의 구심점 최용신
▲ 최용신 기념관 최선생의 제자등 독지가의 후원으로 새로이 단장됐다.
1931년 이 샘골학원에 새로운 선생이 등장한다. 함경도 출신의 23세 처녀 최용신. 어릴 때 앓은 마마의 자국이 얼굴에 나타나 '곰보'로 불리던 신여성이다.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을 거쳐 세 번째 농촌 활동 근거지로 샘골을 택했다.

냉대와 무관심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단점을 노력과 봉사로 극복해 나간다. 부모들을 만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역설하고, 부족한 재정은 지역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얻어낸다. 물론 이 과정이 가장 힘들고 괴로운 여정이었다. 그래도 박용덕, 염석주 같은 선각자들의 도움으로 샘골학원은 체계를 갖추어나가고 새 건물을 지어 인가까지 받는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던 염석주와 최용신, 그리고 그의 은사였던 황에스더 선생 등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의 주목 대상이 아닌가? 가난과 무지와의 싸움에다 나라 잃은 설움과 감시도 당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최용신은 조선어를 과감하게 가르치고, 실생활에 필요한 재봉이나 수예, 가사 등을 포함하였다. 어른들을 위한 교육도 병행하여 농촌 계몽에 앞장섰으며, 시오리길 야목리까지 야간 원정 교육도 마다하지 않았다.

# 고통속에 핀 꿈 27세에 접다
그러다 병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각기병에 시달려 다리를 절고 장중첩증-장이 빈 상태에서 무리한 활동을 하다가 창자가 다른 창자 속으로 꼬여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1935년 1월 27세 때였다. 당시 최용신 선생이 입원했던 도립수원의료원(현 화성행궁 자리)가는 길은 병문안을 가는 샘골 사람들로 가득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최용신 선생이 입원할 때도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업어서 날라 화제가 됐었고.

죽으면서도 샘골강습소에 대한 염원을 유언으로 남겼고 17세에 약혼했던 김학준 선생과는 이승에서 못다 이룬 첫사랑을 천국에서 나누나보다. 최용신 선생의 장례는 당시 사회장(위원장·염석주)으로 치렀으며 묘소는 샘골강습소가 바라보이는 일리공동묘지(현 상록수역 근처)에 썼는데 옛 강습소 자리 아래로 1975년 이전하였다. 그해에 세상을 뜬 김학준 선생의 유해도 유언에 따라 나란히 모셨다. 최 선생의 묘를 이장할 때 김 선생의 코트가 나와서 이를 본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옛 강습소 자리와 샘골교회는 아파트 단지로 편입될 뻔하다가 지역 유지들의 청원으로 살려내서 오늘의 상록수공원이 된다. 최 선생이 심은 향나무들은 '상록수'가 되어 이 봄 푸름을 더한다. 전시관과 강의실, 두 분의 묘소와 운동기구 등을 갖춘 도심 속의 공원으로 거듭 태어났다. 전시관에선 옛 교과서 전시가 한창이고 영화 '상록수'도 상영한다. 너른 주차장이며 깨끗이 다듬은 공원은 지역주민들에게 자긍심도 심어준다.

 
 
▲ 상록수 공원 종탑
# 소설과 영화로 되살아난 상록수

1935년 '신가정' 5월호엔 '고 최용신 양이 밟아온 업적의 길' 이란 기사가 실린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도 하고, 문학을 비롯하여 연극과 영화 무대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심훈(1901~1936) 선생이 이를 놓치지 않는다. 최용신을 소설 속 채영신으로, 자신의 조카이자 공동경작회를 이끌던 심재영을 박동혁으로 만들어 일제에 대한 저항과 재미를 곁들였다. 신들린듯 50여일만에 소설 '상록수'를 쓰고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된다. 그리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2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소설의 내용이 마침 '브 나르도'-민중 속으로-운동을 벌이던 동아일보의 방침과도 맞아 떨어진다. 일제 강점기 농촌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계몽활동에 불을 지피게 된다. 심훈 선생은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제작자며 실무자까지 골라 놓고 총독부에 시나리오 검열을 신청하지만 반려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서. 이에 상심한 상태에서 심훈 선생은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뜬다. 이후에도 여러 영화인들이 상록수의 감동을 영화로 담아내려고 한다. 그중 1961년 신상옥 감독 최은희, 신영균 주연 작품과 1978년 임권택 감독 한혜숙, 김희라 주연의 영화 '상록수'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심훈 선생의 묘소는 용인시 신봉동에서 10여년 전에 안성으로 옮겼다가 최근에 다시 당진 송악 필경사 옆으로 이장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손으로 지은 필경사(筆耕舍)에서 쓴 소설 '상록수'는 곧 작가의 이상 세계이다. 오죽했으면 '붓으로 경작하는 집' 이라고 당호를 걸었을까. 1977년부터 이어온 당진군의 상록문화제와 10여년 전에 제정한 심훈문학상으로, 또 사단법인 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가 심훈 선생의 뜻을 이어간다.

# 상록수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도록 그 학교 이름들이 '상록'이며 전철역도 상록수며, 용신길과 용신교 등등, 이곳은 온통 최용신 선생의 자취가 살아 숨쉬는 마을이 되었다.

최용신 선생의 상록수 정신이 비단 이름으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정신이 살아나서 선생의 사후에도 샘골강습소는 이어졌고 새마을운동과 4H정신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가 이웃에 자리한 것을 우연이라고만 할 것인가?

▲ 상록수정신이 계승된 샘골 본오동 '은빛둥지회'에선 컴퓨터기초부터 동영상 촬영까지 등록회원 170명에 3천700명이 강좌를 수료했다.
지금은 또다른 상록수 정신이 펼쳐진다. 고령화 사회, 컴퓨터와 디지털 사회에 자신도 모르게 컴맹으로 전락하고 만 노인들을 위해 컴퓨터와 디지털 교육이 이뤄지는 현장이 샘골 본오동에 자리 잡았다. 실버 세대를 뜻하는지 은빛으로 빛나는 삶을 뜻하는지 그 이름은 은빛둥지회이다.

한글과 인터넷 등 컴퓨터 기초부터 엑셀과 파워포인트, 그리고 포토숍 디자인과 동영상 촬영과 편집까지 다양하게 가르치는데 실내가 좁을 정도로 호응을 얻으면서 열기 또한 후끈하다. 회원으로 등록한 사람이 170여명에다 이제까지 각종 강좌를 수료한 사람은 3천7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더구나 이 모임에서 동영상 촬영과 편집을 배운 회원들이 염석주 선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중이다.

사실 샘골강습소의 든든한 후원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선생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총 3부작으로 기획했다는데 제작을 위해서 각종 기록과 문헌을 뒤지는 것은 물론 만주까지 가서도 조사하고 촬영해서 얻은 역작이다. 노인들이 새로운 문화에 빠져들고 성취해내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이야말로 최용신 선생의 상록수 정신을 시대에 맞게 계승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