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향리갯벌. 폭격훈련이 멈춘 매향리 갯벌에 주민들이 조개를 줍는 등 생업에 열중이다. 멀리 뒷편에 미군부대 관련 시설들이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조형기 편집위원·hyungphoto@naver.com
매향리는 늘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54년 동안이나 퍼부어대던 미군 비행기의 폭격 연습, 그를 지척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 그리고 대책위원회 사람들, 바다와 섬까지도.
폭격 연습을 하기 위해 비행기가 날아오면 울렁거리기 시작해서 폭파 소리가 들릴 때면 굉음이 고막을 찢는 듯하고 이어서 무기력증에 빠지면서 주저앉게 되었다.
지난 2001년인가 아직 폭격이 한창이던 때 전만규(53) 대책위원장을 만났었다.
깡마르고 검은 얼굴에 눈만 살아서 독기로 반짝였는데 흡사 몇 달 굶은 살쾡이의 모습이 저러지 않을까 싶었다.

# 따사로운 마을에 비행기 사격장이 들어서다
매향리(梅香里), 고온리(古溫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 이름인가? 바닷가 마을에 갯내음이 아닌 매화 향기가 가득하고 예로부터 따사로운 마을이 아니던가. 썰물 때 펼쳐지는 드넓은 갯벌은 한 번에 다 바라보기도 어렵고, 바지락이며 굴이며 지천으로 깔렸던 마을 앞 바다였다. 그야말로 '문전옥답'이었다. 그러나 파도를 막아주어서 더욱 좋았던 인근의 농섬과 웃섬 일대가 1951년 미군의 비행기 사격장이 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B-52라는 시커멓고 산만한 놈이 웅웅거리며 날아와서 폭탄을 떨어뜨리면 몇 시간 동안이나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비행기 소리와 폭격소리에 환청이 생겨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어요." "극도로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이어서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싸우거나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 매향리어촌계 전경. 폭격에 소음은 옛이야기인듯 한가로운 모습을 보이는 매향리 포구는 대형횟집이 들어서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민들의 말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에서 평화가 사라진 것이다. 미군은 초음속 전투기와 A-10기 등을 이용해 실전용 폭탄을 터뜨리기도 하고 모의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국내 주둔 미군들은 물론이고 멀리 필리핀이나 대만 주둔 미군들도 이곳을 사격장으로 썼다. 이곳이 사격장으로 지정된 이유는 실전과 비슷하게 마을에 사람이 살고 있는데다 육지와 가까워 공중회전을 할 때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분명하게 보인다는 점이 작용했다. 더욱이 미군 오산기지에서 아주 가깝다는 경제성도 큰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농민이건 어민이건 주민들은 마음을 졸여가며 참아야만 했다.

한국전쟁 때 몰려온 피란민들도 서로 어울려 따뜻하게 지냈던 마을 고온리(KO-ON-NI)는 이내 미군의 쿠니(KOON-NI)사격장이 되었다. 글자는 같지만 띄어쓰기를 잘못해서 생긴 무지였고 점령군으로서의 강제가 거센소리로 끼어들기도 했다.

# 매향(梅香)인가 매향(埋香)인가
1920년 간행된 지도를 보면 매향리 위쪽 가로지(可老地)에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사구(砂丘·모래언덕)가 높고 길게 펼쳐졌었다. 언덕 위엔 울창한 숲인듯 방풍림이 표기되었고 사구 안쪽으로는 석호처럼 호수가 표시되었다. 아마도 바닷물이 드나들다가 자연스레 생긴 사구와 호수였을 것이다. 물론 이곳은 나중에 염전으로 쓰다가 논으로도 썼고 지금은 공장 터가 되었다.

주민들은 방풍림과 주변의 여러 나무, 꽃에서도 향기가 나서 매향리로 불렀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바닷가 마을이고 갯벌이 넓으며 자연 석호까지 갖춘 곳으로 봐서 향나무를 묻는 매향(埋香)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어본다. 바닷가 갯벌에 매향을 해서 300~400년이 지나면 침향(沈香)이 되어 저절로 떠오른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이를 미륵불이 나타난 것으로 보는데 미래의 이상향을 뜻하지 않는가? 매향의 한 증거로 매향비를 새기기도 하는데, 매향리 주변에서 매향비 얘기를 아직 듣지는 못했다.

# 다시 평화마을로 돌아오다
▲ 농섬 전경. 나무와 풀이 무성해서 농섬이라 불렸던 섬이 폭격에 상흔만 남긴채 크기는 3분의 1로 줄었고 대형 폭탄들이 절개지에 흉물스럽게 박혀 있다.
2005년 8월 12일, 20여년의 투쟁과 재판 끝에 매향리의 쿠니사격장은 폐쇄됐다.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 온 악몽이 끝나버린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폭파'하는 심정으로 일선에 선 전만규 위원장조차 현실을 믿을 수 없어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세계 최강의 미군과 싸워서 이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게다가 보상까지 받아냈다. 미국이 아닌 우리 정부에서 받은 것이 아쉽긴 하지만.

과거 '매향리 미공군 폭격소음 공해 대책 추진위원회'는 이제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어 달았다. 미공군, 폭격, 소음, 공해 등 대부분의 단어가 부정적인 뜻이었던데 비해 얼마나 평화스런 이름인가? 추진위 사무실 앞에는 사격장에서 수거해 온 폭탄과 그 잔해들을 사들여 전시하고 있다. 총알 자국이 무성한 폭탄과 그 파편들은 전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설치미술 전체는 대규모의 전쟁놀이를 보는 듯하다. '이제 전쟁을 그만 했으면…' 하는 기원을 담은 것이다. 이곳이 진정한 전쟁종식 기념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 수거된 포탄들. 투쟁위사무실에서 지금은 평화마을 건립추진위로 바뀐 기념관에 농섬에서 수거된 각종 포탄들이 진열돼 있다.
자연은 늘 그렇듯이 위대하다. 폭격 소리에 놀라서 도망갔던 갈매기며 도요새 등이 날아들고 갯벌에는 파래 등 해초들이 넓게 깔린다. 폭탄 투하에 불규칙했던 파도마저 질서를 되찾은 결과이리라. 그래도 썰물 때 장화 신고 들어간 농섬과 웃섬에는 여전히 폭탄이 무수히 박혀 쓸쓸한 마음이 들게 한다. 그 갯벌 지하 60여까지도 폭탄이 박혔다니 보이지 않는 상흔은 또 얼마나 많으랴!

농섬과 웃섬은 그 크기가 삼분의 일로 줄어들어 썰렁한 모습이었다. 나무와 풀이 무성해서 농(濃)섬이라고 불렀던 곳이 이곳저곳 잘려나가 몰골만 남은 탓이다. 그러나 농섬과 웃섬을 잇는 사구가 다시 생기는 중이다. 아직은 썰물 때만 드러나지만 섬이 되살아나는 희망이 아닐까?

▲ 초가지붕이 아닌 A형텐트처럼 생긴 천막 해신당.
마을 끝 언덕 위에는 천막으로 만든 해신당이 보인다. 전에는 작지만 아담하게 초가지붕을 덮은 모습이었다는데 천막으로 대신한 것이다. 어민들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풍어와 안전을 빌었던 당집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사탕 몇 봉지가 아직은 당집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놓였다. 과거에는 숭어찜과 막걸리 등으로 풍성한 제단을 차렸던 곳이다. 사격장 폐쇄 후 횟집들이 늘어나고 기아자동차 직원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매향리는 빠르게 회복되어 간다. A형 텐트처럼 생긴 천막 해신당이면 어떠랴.

미군부대 막사는 녹슨 채 문을 굳게 닫아걸었고 인근의 기아자동차 공장에서는 근로자들이 땀을 흘리는 가운데 어민은 어민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봄맞이가 한창이다. 이런 평화 아닌 일상도 50여년 동안 남의 일이었던 곳, 이제 막 찾아온 평화가 무한히 지속되길 빌어본다.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하여 더 빨리 더 아름다운 평화가 찾아들기를….

■ 싸지노프 소령을 찾습니다
▲ 1920년대 간행된 지도
1960년대 중반 부대장으로 쿠니사격장에 온 싸지노프 소령은 마을 사람들과 동화되었던 단 한 사람의 장교였다.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했으며 부대에서 식료품을 가져다가 주민들에게 주기도 하고 양명공민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금의 기아자동차 춘추관 자리가 바로 양명학교 터였다는데 큰 키에 서글서글한 품성을 지닌 그를 주민들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50년이 넘도록 모든 지휘관들은 점령군으로 군림하였지 싸지노프 같은 지휘관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비행기 소리와 폭격 소리 등 힘든 고통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위로를 안겨주었던 싸지노프 소령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까? 아마도 그만은 오늘의 매향리를 축하할 것이다.
/염상균·역사탐방연구회 연구위원 sbans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