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농원으로 가는 길을 묻던 중 바지락을 까던 할머니는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벌려 갓 긁어낸 조갯살을 건네준다.
섬마을의 인심이 비강(鼻腔)을 넘나드는 배릿한 바다내음 만큼이나 진하게 느껴진다.
몇마디 나누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데 기어코 세번째 바지락을 먹게 만든다.
"섬이니까 맛볼 수 있는거유. 육지에서는 어디 이렇게 싱싱한 바지락 먹어볼 수 있겠어?" 노인의 넉넉한 입담이 바지락 맛보다 더 간간하다.
인근의 '형제섬'들과 손을 맞잡지 못한 섬. 이 때문에 삼목여객터미널을 떠난 배는 신도선착장에 뱃머리를 댄 후 방향을 틀어 다시 30여분간 바닷길을 갈라야 한다.
장봉선착장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인어상이었다. 번쩍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아담한 크기에 순수 한국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인어상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장봉도의 앞바다에는 '날가지'라 불리는 유명한 어장이 있었다.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날가지 어장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인어 한마리가 걸렸다. 뱃사람들은 그 인어를 측은히 여겨 놓아주었는데 그 때부터 날가지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만선을 이뤘다는 전설이다. 뱃사람들은 인어가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믿고 매년 그 인어를 위해 용왕제를 지냈다고 한다.
섬이 길고(長), 봉우리(峯)가 많다하여 장봉이라 이름붙여진 섬 장봉도(長峯島)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3대어장 중 하나로 꼽혔다.
조기, 민어, 청어 등 많은 물고기가 잡혔고 조석간만의 차가 큰데다 유기물이 풍부해 갯벌에는 예부터 갑각류나 조개류, 갯지렁이 등 생물이 다량으로 서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봉도를 유명하게 한 것은 '새우'였다. 장봉도는 1880년대부터 새우어장으로 이름을 떨친 것으로 전해진다.
장봉도 출신으로 한들해수욕장에서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김현영(71)씨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장봉2·4리 일대 건어장에는 말린 새우가 넘쳐났고 새우를 취급하는 움막이 해변가에 수십채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어획량이 줄어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당시 장봉도의 새우는 홍콩과 일본에까지 수출됐다고 한다.
돈이 풍부하다보니 술집도 즐비했다는 게 김씨가 전하는 장봉도의 옛 풍경이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 것일까. 20~30년 전의 일인데도 장봉도에서 당시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실제로 옹진군 북도면사무소 장봉파출소에 따르면 장봉도 주민들(6월2일 기준 363세대 882명)의 생업분포는 농업 70%, 어업 20%, 관광업 10%로, 농업의 비중이 어업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섬을 둘러싸고 80㏊의 김 양식장과 15㏊의 굴 양식장 그리고 패류, 게, 소라, 낙지 등을 잡는 마을어업구역이 포진해 있을 뿐 아니라 장봉김과 상합 등은 여전히 장봉도의 특산물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주된 삶의 방식은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친환경 농업'이 섬을 특징짓는 키워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옹진군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2003년부터 전략적으로 장봉도에 친환경농법을 도입했다.
장봉4리 김강현(50)씨의 논을 찾았을 때 논 곳곳에서는 불그스레한 우렁이 알이 포도알처럼 벼에 붙어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렁이가 농사를 대신하고 있는 셈으로 조용한 밤 귀를 기울이면 우렁이가 논의 잡초를 갉아먹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장봉도의 모든 논(32.5ha)에는 이처럼 우렁이가 서식하고 있다.
6년째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김씨는 "우렁이 농법이라고 해도 이따금 김을 매고 논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해야 하는 등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며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생산량은 줄었지만 판매 가격이 높아 전반적으로 소득이 증대했다"고 말했다.
장봉도의 특산물로 떠오르고 있는 '곰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장봉도의 친환경 농산물이다. 장봉출장소 인근 곰취 재배농가에서 만난 조영덕 농촌지도사는 농약을 전혀 치지 않은 친환경 농산물이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비닐하우스에서 바로 딴 곰취를 씻지도 않은 채 먹어보라며 권했다. 곰발바닥을 닮은 이 푸성귀의 쌉쌀한 맛은 저절로 삼겹살을 떠올리게 했다. 장봉도에서 곰취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 10월부터로 올해 6월 친환경인증을 받았다.
북도면의 열도 가운데 신도와 시도가 '연인', '풀하우스', '슬픈 연가' 등 TV드라마의 세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면 장봉도는 이처럼 '친환경'을 콘셉트로 섬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물론 장봉도에도 TV 드라마 세트장이 설치돼 있기는 하다. 차인표와 조재현이 출연한 '홍콩 익스프레스'세트장이다. 그러나 이 세트장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은 뜸한 듯 했다.
장봉도는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간직한 섬이다.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가운데 모든 것이 넉넉해 보이는 섬 장봉도.
그러나 이 섬에도 옥에 티는 있었다. 바로 인천국제공항의 항공기 소음이다. 해변가 마을에서 조개를 까던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항공기는 수시로 굉음을 터뜨렸다. 그럴 때면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누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노부부는 "저 놈들(항공기)은 밤이고 낮이고 돌아다닌다"며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나서부터 욕을 배웠다"고 말했다.
외지인에게 선뜻 바지락을 건네는 순박한 섬사람들이 세상의 변화와 맞물려 조금씩 변하는 것은 아닌지….
장봉선착장 바닷가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릴 때 귓가에는 파도소리와 항공기 소리가 뒤엉키고 있었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