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택시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지난달 29일 열린 '제2연평해전 6주년 기념식' 장면.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유가족을 비롯한 군관계자 등 많은 시민들이 함께한 가운데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
2008년 6월 29일 일요일 오전 8시,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쳤다. 문득 걱정이 앞섰다.

이날은 평택시 해군2함대 사령부에서 지난 2002년 6월29일 연평도 부근에서 우리 바다를 지키기 위해 북한 경비정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6인의 제2연평해전 영웅들에 대한 추모행사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몇해전 비가 내리는 가운데 2함대 사령부 실내 체육관에서 초라하게 열렸던 서해교전 추모행사에 참석했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기지내 제2연평해전 전적비 앞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4당 대표 등 주요 정치인과 각 군 관계자, 유족, 부상자, 각계 대표, 시민 등 1천500여명이 기념식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보다 4배나 많은 인원이었다.

행사 시작 20분전. 그때까지 줄기차게 뿌려대던 비는 어느새 신기하게 멈췄다. 하늘도 6년만에 마침내 영웅으로 우뚝 선 6인의 용사들을 반기는 것일까. 거세게 불던 바람도 잔잔했다. 출렁이던 바다도 숨을 죽였다.

오전 10시 추모 행사 개식 선포와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있은 후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정을 타고 전투를 지휘하다 부상 당한 이희완(해사 51) 대위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2연평해전 경과 보고를 읽어 내려갔다. 경과보고는 그 자체가 전투 상황일지였다.

"고 윤영하 소령은 적의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함교에서 태산같이 버티며 부하들에게 반격을 지휘하다 용맹스럽게 전사했고, M-60사수였던 고 서후원 중사는 마지막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고 당시를 기억해냈다.

"함포 사수 고 조천형 중사와 황도현 중사는 적의 포탄에 명중돼 경비정이 화염에 휩싸인 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응사하다 장렬히 산화했으며 조타장 고 한상국 중사는 실종 41일만에 바다속에 가라앉은 참수리 357호정에서 타기(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키)를 놓지 않고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 애통함 뒤의 탄식이 흘러나왔을뿐 장내는 숙연했다. 어느 유족의 흐느낌만이 들려왔다.

이 대위는 "박동혁 병장은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기 위해 함교 이리저리를 뛰어다니다 적의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된 뒤 눈물겨운 투병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꽃다운 젊음을 조국에 바쳤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기어코 울먹이고 말았다.

이 대위 자신도 윤 소령이 전사한 뒤 부장으로서 전투를 지휘하다 포탄 파편에 왼쪽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오른쪽 다리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고 의족에 의지하고 있다. 유족들은 전사한 아들의 이름이 호명 될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제2연평해전은 전국이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4강 진출이라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 무렵에 발생했다.

2002년 6월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남북 해빙무드 탓에 평화롭고 조용했던 서해 연평도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우리 고속정 참수리 357호정에 대해 사전 경고없이 기습공격을 가해옴으로써 발발한 것이다.

즉각 우리 함정이 적극 대응해 오전 10시25분부터 30여분간 양측에서 교전이 벌어져 해군 제2함대 사령부 소속 윤영하 소령, 고 한상국 중사 등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북한 경비정은 우리 함정의 집중 포화를 받아 화염에 휩싸였고, 수십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고 북쪽으로 퇴각했다. 6인의 영웅들과 부상자들의 용맹스러움이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남북한간 정규병력이 벌인 전투에서 대한민국의 영해를 지켜낸 해전이었다.

긴박했던 30여분간의 교전은 그렇게 끝났고, 참수리 357호정은 기관실에 지름 20㎝의 구멍이 뚫려 침수되는 상태로 아군 고속정에 의해 예인 중 생존자들의 결사적인 방수작업에도 불구하고 11시 59분에 침몰, 53일만에 인양됐다.

하지만 그 당시 제2연평해전의 의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장렬히 싸우다 산화한 6인의 영웅들은 변변한 추도행사 없이 외롭게 하늘로 보내졌다. 유족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매년 열린 추모행사는 초라했다. 유족들은 분노했다.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대한민국의 아들들을 잊으면 다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젊은이는 없을 것"이라고 절규했지만 6인의 영웅들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유족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고 한상국 중사의 아내 김종선씨가 전사자 홀대에 실망해 미국으로 떠났을까.

힘겹게 투병생활을 벌이다 세상을 떠난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씨는 당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을 글로 남겼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한 채 9월 20일 새벽, 하늘 나라로 간 내 아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쓸한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섭섭함을 표출한 박병장 어머니의 글은 당시 인터넷상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유족들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시간은 그렇게 6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6월29일 해군2함대 사령부 제2연평해전 전적비 앞에는 이들을 추모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현 정부는 제2연평해전의 기념식을 처음으로 정부 주관으로 치렀다.

이 자리에서 한승수 국무총리는 "우리는 제2연평해전의 의미를 올바로 평가하지도 못했고, 변변한 추도행사도 없이 여섯분의 영웅을 떠나 보냈다"며 "대한민국은 목숨을 바쳐 조국의 바다를 지켜낸 이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념식 내내 흐느껴 주위를 안타깝게 했던 고 황도현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62)씨는 "정부 행사로 격상돼 우리 아들이 명예회복을 한 기쁜 날인데 자꾸만 눈물이 난다"며 "그동안 억울한 심정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는 "남편이 이제라도 명예를 회복해 행복하다"고 했다.

이날 제2연평해전 기념식에 참석키 위해 방한한 케네스 스위프트(77) 전 센트럴 매사추세츠 한국전 참전 기념회 회장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계속 알려야 그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행사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떠나 조용한 제2연평해전 전적비 앞. 6인 영웅들의 모습이 새겨져있는 부조상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문득 한 네티즌이 사이버 추모관에 올린 글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영웅들이여. 죽어서도 놓을 수 없었던 참수리 357호의 방향키는 바로 그대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의 방향키는 아니었습니까. 이제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소서. 고마웠고,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꽃다운 젊음을 조국의 바다에 바친 6인의 영웅들은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묵묵히 자신들을 품었던 서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NLL사수' 작전중 희생… '해전'으로 높여

■ '제2연평해전' 격상 배경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께 서해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측 해군 고속정인 참수리 357호에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우리 군 6명이 전사했다. 이후 해군 2함대사령관 주관으로 매년 '서해교전' 전사자 추모식이 열렸으나 그동안 전사자들이 'NLL 사수'라는 작전목표를 달성하다 희생된 만큼 '교전'이 아닌 '해전'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지적이 정치계 등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됐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올해 4월 서해교전이라는 명칭을 '제2연평해전'으로 공식 변경하고 해군교육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에 전사자 6명의 흉상을 건립했으며, 정부도 '추모식'을 '기념식'으로 명칭을 바꾸고 행사 주관처를 격상했다.

사진/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