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미리 들녘. 아미리는 작은 구릉에 마을을 품고 앞에 넓은 들녘을 가진 전형적인 우리네 경기지역 농촌마을이다. 마을 뒤편 능선너머로 근대 변화의 상징 아파트 군락이 남아 있는 들녘도 넘보듯 좌우로 포진해 있다.

# 아미리는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는 농촌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곳이다. 1930년대 일제가 식민지 조선 농촌을 통제하기 위해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이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다. 1950년대에는 마을 주민들에 의한 자율적인 마을공동체 운동이 일어났다. 19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후 아미리는 두 차례나 '자립마을'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경기도 새마을 운동을 상징하는 마을이 됐다.

지금은 '하이닉스 반도체'로 이름이 바뀐 현대전자 이천공장이 1983년 아미리에 들어선다. 이를 계기로 농촌 마을이었던 아미리는 도농복합형 공간구조로 완전히 바뀌었다. 현대전자가 들어서기 전인 1970년대 말 아미리 인구는 600여 명이었으나, 2007년 말에는 이전보다 13배 늘어난 3천775세대 7천886명이다.

아미리는 마을의 역사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아미리 마을을 변화시킨 하이닉스 공장이 들어서 있는 곳이 아미 3리이다. 이곳에는 고층아파트도 들어서 있다. 일종의 기업도시인 셈이다. 공장 정문 건너편에 1980년대 이후 새롭게 형성된 상가가 있다. 아미 1리의 '큰말'에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된 집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장등'에는 고 최공장환근적불망비(故崔公章煥勤績不忘碑)'가 있다. 최장환은 식민지 말기에 아미리에서 근검절약, 금주 등 생활개선운동을 벌인 아미리 농촌운동 지도자였다. 1945년 그가 사망한 후 마을 주민들이 건립한 기념비이다. 이처럼 아미리에 가면 넓지 않은 마을 공간 안에서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과 1970년대 새마을운동 흔적, 그리고 21세 기업도시형 공간 구조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 식당을 해서 돈을 벌어 '그룹'을 이룬 상인

▲ 최장환근적비(왼쪽).
답사차 방문한 상가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서 식당 종업원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경주가 고향이란다. 현대전자 이천공장에 취직해서 이곳에 왔다가 신랑을 만나 결혼해서 지금 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음이 넉넉해 보이는 경주댁은 마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이닉스 공장 건설 초기부터 상가에 자리잡은 어느 식당은 24시간 영업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자식들이 동네 곳곳에 가게를 열도록 도와주어, 동네 사람들로부터 '그룹'을 이루었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가를 자세히 살펴보니 업종은 다르면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상가를 지나면 첫 번째 경계인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면 '새말'이 나타난다. '새말'에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온 듯하다. 음식점은 한 곳도 없다.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새말' 안길을 지나면 하이닉스 협력 공장이 몇 개 있다. 공장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낮에는 사람들 왕래가 별로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언덕을 올라가면 두 번째 경계인 '장등'이 나온다. 이전에는 언덕이 가팔라서 '꼴딱 고개'라 불렸으나,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장등'을 깎는 평탄공사를 하여 지금은 그리 가파르지 않다. 넓은 공터에는 마을회관이 있다. 그리고 구 마을회관 한 쪽 구석에 구판장이 있다. 굴다리 안의 유일한 가게이다. 두 번째 경계를 넘어가면 '큰말'이 있다. '큰말'은 상점도 없고 공장도 없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개량한 슬레이트 지붕이 아직도 많이 있다. 현대식으로 개량한 집도 여기저기 보였다. 그리고 거의 한집 건너 폐가가 있었다. 마을은 무척 조용하여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는 학생들만 간간이 눈에 띌 뿐이다.

▲ 하이닉스 반도체전자

첫 번째 경계인 굴다리는 마을 간 소통 단절을 상징하는 경계이다. 상가는 하이닉스 공장이 들어서고 1980년대에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다. 굴다리 건너에 있는 '새말'은 이전부터 있던 마을이다.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생계 방법이 다르니 소통할 일도 없다고 한다. 큰 기업이 들어선 후 마을공동체가 붕괴된 상징적인 경계이다. 두 번째 경계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가르는 경계이고, 하이닉스 공장 영향력의 경계이다. '새말'에는 하이닉스 공장 협력업체가 들어 서 있는 반면, '큰말'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마을 공간 구조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주거 공간이다. 하이닉스 공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발전하였으나 이처럼 마을을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말았다.


# 아미 1리 마을에는 두 개의 경계가 있다

▲ 반도체전자앞 상가. 하이닉스직원을 주고객으로 하는 전자앞 상가가 3교대 출·퇴근에 맞춰 성업중이다.
아미 1리는 아미리 전체인구의 13%인 439세대 1천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아미리의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마을이다. 아미 1리에는 두 개의 경계가 있다. 첫 번째 경계는 공장 앞 상가와 '새말' 사이에 있는 굴다리이다. 두 번째 경계는 '새말'과 '큰말' 사이에 있는 '장등'이라고 불리는 평평한 마을 공유지이다. 상가는 1만1천700여명이 근무하는 하이닉스 공장 노동자들의 휴식 공간이어서 날로 번창하고 있다. 하이닉스 공장은 4개조가 새벽 6시, 오후 2시, 저녁 10시 3교대로 근무한다. 그래서 상가에는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으며, 진풍경도 펼쳐진다. 새벽 6시 대부분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에, 이 곳 상가에는 곤한 몸을 이끌고 동료들과 한잔하기 위해 식당을 찾는 이들이 있다. 오후 2시가 되면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난다. 젊은 여성들이 여기저기 상점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가꾼다. 그런데 대낮부터 하품을 하는 여성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근무하는 시간이 계속 바뀌니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것 같다. 저녁 10시가 되면 상가는 다시 시끌벅적거린다. 동료들과 회식을 위해 식당을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 20대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아미 3리


아미 3리는 하이닉스가 입주한 후 1리에서 독립된 행정구역이다. 그런데 아미 3리 인구 구성이 매우 흥미롭다. 2007년 12월 말 현재 4천27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중 여성이 2천719명으로 전체의 3분 2를 차지한다. 그리고 15세에서 29세까지 인구가 2천125명으로 역시 3리 전체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부발읍에 그 까닭을 문의하니 하이닉스 공장부지 내에 기숙사가 있고, 그곳에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입주해 있기 때문이란다.

▲ 아미1리 전경. 아미3리의 변화와는 무관한듯 아미1리는 연립주택이 들어선 것 외에는 70~80년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억

▲ 아미1리 구판장. 수십개의 상가가 있는 3리와는 대조적으로 1리마을의 유일한 가게이다.
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 대부분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국 농촌근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고, 위로부터의 관제농촌운동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아미리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두 번에 걸쳐 '자립마을'로 선정되었다. '자립마을'로 선정되면 표창장과 아울러 마을에 필요한 예산을 전폭적으로 지원받았다. 아미리가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성공적인 사례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래 전부터 자율적 마을공동체 운동을 펼친 경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아미리 마을에 정미조합이 결성되었다. 정미소를 마을 공동소유로 운영하면서 여기서 발생한 이익을 마을 공동재산으로 관리하였다. 그 과정에서 마을 중요사를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협의하여 추진하는 경험을 쌓아 나갔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초기에 성공한 지역으로 선정된 대부분 마을이 자율적인 마을 운동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아미리를 보면서 새
마을운동이 마을의 자주적인 역량 과 정부의 주도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농촌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갑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