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업도는 섬모양이 사람이 엎드려 땅을 파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굴업도라 부르며 해안경관이 아름답게 펼쳐진 작고 아담한 섬이다.

1996년 한 민간업체가 '누드비치'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던 굴업도(掘業島). 이보다 2년 앞서 정부는 이곳을 핵폐기물 처분장의 최적지로 꼽고 다음해 지정·고시까지 마쳤었다. 최근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섬 전체를 관광단지화하려고 발빠른 행보에 나서고 있다.

▲ 섬주민 전체가 갯바위에서 정화작업을 하고 있다. 갯바위 정화 작업은 굴 껍데기를 갯바위에서 제거해 올겨울에 굴이 더 많이 자랄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특정 섬을 두고 발생한 각종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국내에서 전례가 없는 최초이거나 파격적인 시도라는 점이다. 둘째, 재정상으로 막대한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 셋째, 개발을 적극 반대하는 여론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굴업도는 지금껏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옛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해의 섬 중 특히 여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외부 손길이나 변화의 모습을 꺼려하는 굴업도는 취재진에게조차 쉽사리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달 초 1차로 나선 장도에서 도중 하차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는 굴업도로 향하는 직항편이 없어 부득이 덕적도를 경유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발이 묶인 것이다.

해상에 지독하게 깔린 안개로 덕적 일대 자도(子島)를 순회하는 '해양호' 운항이 불가하다는 게 선사측의 일방적 통보였다. 더욱이 당시 기상 상태로는 이튿날 역시 화창하게 갠 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천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5일 다시 채비를 갖췄다. 이날도 옅은 해무가 깔려 불안감이 커진 상태였으나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는 승객들의 모든 바람이 그랬던지 2시간 넘게 이동한 끝에 굴업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직선 거리로 60㎞가량 떨어진 굴업도는 덕적(德積)을 모도(母島)로 서포3리가 행정구역의 공식 지명이다.

바닷길로는 서해 최북단 연평도에 비해 3분의 2 수준이지만 오히려 멀게 느껴지는 것은 불편한 교통편 때문이다. 굴업도 주민을 실어 나르는 해양호는 하루 한 차례, 정해진 시각에만 돛을 올린다.

▲ 조용했던 섬이 리조트 사업을 앞두고 술렁이고 있는 가운데 CJ리조트 관계자가 섬 주민들에게 사업설명회를 하고 있다.
그나마 격일제로 다니던 상황에서 많이 개선됐다. 20년 전 경인일보가 연재한 기사에서 "날이 궂거나 배가 고장이라도 나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보름에서 한 달까지 뱃길이 끊어진다. 섬 밖에서 살던 사람들이 어쩌다 섬을 찾으러 마음 먹다가도 오가는 일에 겁을 내 주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1.72㎢ 남짓으로 동서로 분리된 두 개의 섬이 모래사장으로 연결돼 있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망망대해를 접하고 있는 이 해변은 굴업도를 처음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명물이다.

마을은 반월 형태의 해수욕장 뒤로 몰렸는데 주민등록상 거주자는 20가구 37명이다. 꽤 많은 수치지만 실제 섬에는 절반가량인 10가구 24명이 머물 뿐이다. 대부분이 환갑을 훌쩍 넘긴 노부부라 오순도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섬 내부를 구분하는 명칭은 상당수가 옛 주민들로부터 전해져 아직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단다. 온통 억새 군락이 형성된 서쪽에는 초지가 무성하게 뒤덮였는데 이전 생계수단이던 땅콩 재배를 중단하면서 풀이 사람의 키만큼 자라난 것이다.

동북쪽에선 붉은 색을 발하는 해변이 손짓한다. 너무 한적해서 그런지 언제 사람의 발길이 닿았었는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전체가 100 이내 구릉으로 이뤄진 굴업도에서 최고점은 122의 덕물산(德物山)이다.

20년 전 경인일보 지면에 등장했던 이성근(73)씨 부부는 같은 자리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 지난 2002년에 설치된 태양열 발전소.
지난 1980년 초대 이장을 거친 이씨는 "과거 먹을 물이 귀해서 옹달샘을 파기도 했지만 금세 말랐다"며 "이장을 맡은 다음해부터 지하수 사업을 벌여 3곳의 수원(水源)을 찾았다"고 지나온 삶을 뒤돌아봤다.

굴업도가 3곳의 천혜 해수욕장을 갖고서도 그간 관광지로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다. 이후 식수가 풍부하다 보니 가정마다 한철 장사로 민박집을 열었다. 돈벌이가 꽤 짭짤했던지 고된 농사를 차츰 줄여갔다.

이씨는 "여름에만 손님을 받아도 여느 직장인들 연봉보다도 많은 때가 있었지. IMF 때 잠깐 줄어들긴 했는데 요즘 다시 좋아지고 있어. 올핸 손주들 용돈이라도 넉넉하게 줄 수 있겠어"라며 밝게 웃었다.

이씨의 설명처럼 굴업도는 대대로 땅이 척박한 터라 농사를 지어도 결실을 보기 어려웠다. 모래땅에서 억척스럽게 자란 땅콩은 1960년을 기해 수확량이 확연히 감소했고 이젠 식구들이 먹고 부족하지 않을 정도만 텃밭에서 기른다. 섬에서는 태양빛으로 발전기를 돌린다. 이 기계가 들어오기 이전인 2002년까지는 조그만 창고에다 발전시설을 놓고 각 가정에서 당번을 정해 운영했다고 한다. 오후 6시부터 고작해야 5시간 내에 멈추고 말았기에 지금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은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섬 전체에서 밭이 차지하는 비중은 1.8%, 대지가 0.1%에 그쳐 사람이 발 붙이고 살기 힘든 조건이다. 나머지 98%는 임야가 차지하는데 이런 이유로 야생에서 뛰노는 검은 염소와 꽃사슴이 자주 발견된다. 1983년께 인근 울도에서 염소 10마리를 사다가 방목했는데 굴업도로 흘러들었다. 시간이 흘러 그 개체 수가 불어나 지금은 얼마나 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사람의 손을 떠난 25년의 세월 동안 새끼가 새끼를 낳아 완전한 야생동물이 된 것이다.

굴업도의 또 다른 특징은 섬 전반에서 드러나는 암석해안이다. 바다와 맞닿은 곳에 파도로 침식된 절벽 파식대와 소금을 머금은 바닷바람에 침식된 해식대가 주변서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물이 빠지면 연결되는 목섬, 일명 토끼섬은 기묘한 형태의 절벽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994년 12월 조용하던 섬 마을을 발칵 뒤집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정부의 원자력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계획이다. 그 해 발간된 경인일보에 따르면, 국내 부존자원의 절대 부족으로 에너지 수급정책의 방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력 공급의 50%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원자력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었다.

▲ 10가구 24명이 살고 있는 마을과 해변이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고 있다.

당시 정부는 5가구 9명이 살던 무인도나 다름없던 굴업도를 최적지로 꼽았고 인천 시민은 물론 국민들의 이목이 굴업도에 쏠렸다. 이어 방사능 유출사고와 농산물 판로 중단 등을 우려하는 인근 덕적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대대적 반대 물결이 일어났다.

경찰에 연행되는 시민이 속출했고 급기야는 시위를 벌이던 한 노모(老母)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악화일로로 접어들던 사태는 11개월이 흘러 언제 그랬냐는 듯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1995년 2월 핵폐기장 낙점 발표로부터 9개월 뒤 섬내 2곳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되면서 계획 자체가 완전 백지화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아픔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굴업도가 핵폐기장 후보지였다는 사실은 아직도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로 섬에 새겨져 있다.

"그곳은 몇몇 주민들과 바닷새와 서풍에 쏠리는 모래 언덕들만이 잔잔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무공해의 작은 섬일 따름이었습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저서 '굴업도의 평화를 위하여'에 표현된 굴업도다.

2년 전부터 굴업도가 다시 어수선해졌다. CJ그룹이 해양관광단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CJ그룹은 부지 조사를 거쳐 현재 98%가량 부지 매입을 끝마쳤다. 지금까지 섬을 변화시키겠다는 계획들은 번번이 무산됐다. 굴업도를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또는 과오를 반복하는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옛 사진엽서에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보석같은 섬'으로 소개된 굴업도는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시샘을 하나 보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