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면 사람들은 바다로 피서를 가거나 산과 계곡 등에서 일상을 벗어던지려고 한다. 경기 지역에도 수많은 산과 계곡이 도시민들의 여름을 즐겁게 하지만 용인의 깊은 산골이었던 '고기리계곡'은 수원과 용인, 성남과 서울, 의왕과 군포, 안양 사람들까지 즐겨 찾는 계곡유원지이다. 이 마을의 계곡이 이름을 날린 것은 산 때문이다. 광교산(582) 정상 부근의 동북쪽 자락과 백운산(564), 바라산(428)의 동쪽 자락 등이 포근하게 감싸안은 채 모두 고기리 계곡에 물을 흘려주니 수량이 많고 깊은 계곡이 될 수밖에. 더구나 한남정맥의 여러 산 가운데 가장 크고 넓은 산인 광교산 자락이어서 그 상징성까지 더하면 고기리는 분명 경기 남부의 큰 계곡으로 손색이 없겠다.
용인시의 수지구(水枝區)는 대부분 한남정맥이 지나는 곳이거나 광교산 자락과 맞물린 곳이다. 수지는 경기도의 강원도라는 별명이 붙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지읍으로 불리던 곳인데 수진면(水眞面)과 지내면(枝內面)을 합친 이름이다. 또 더 산골짜기 동네였던 고기리(古基里)는 고분현(古盆峴)과 손기동(遜基洞)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분현은 지금도 고분재라는 고개 이름으로 불리는 곳인데 고기리에서 의왕시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고분이라고 동이 분(盆)을 쓴 이유는 이 언저리에서 장석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도토(陶土)는 장석이 풍화한 것 아닌가. 장석은 사기그릇 유약의 첨가물로도 쓰였고 대개 광주 분원리 사기막에 대주었다는 것이 마을 노인들의 옛 기억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둘인데 그 하나는 고기리에서 일제강점기에 장석광산을 경영했다는 것과, 고분재 너머 의왕시 학의동에 사기장골이라는 골짜기에서 가마터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고기리 계곡이 유명하게 된 것은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자가용시대가 열리면서 불편한 계곡 길이라도 호젓한 곳을 찾으려는 도시 사람들의 욕구와 현지인들이 그들을 위해 음식을 팔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유원지로 발돋움한 계기였다. 지금은 그 명성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40여 곳의 음식점과 펜션에 전원주택까지 들어서 '계곡도시'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특히 여름날 계곡에 발 담그고 먹는 보신 요리들이 은밀히 알려지면서 단체로 찾는 명소가 되었다. 어린이들은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때로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족구' 한판을 하고 '보신'을 하는 단체들도 늘어나 음식점들은 족구장을 설치하느라 서로 경쟁도 하였다. 그 뿐인가. 음식 예약만 잘하면 무료 민박에 셔틀버스까지 제공하는 음식점도 많아서 각종 모임의 '총무'들이 앞 다투어 사전 답사를 오는 곳이 되었다.
# 산신제도 모시는 마을
산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은 산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산신을 잘 모셔서 산 사고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내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주는 산신에게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와 음식을 나누며 마을 사람 서로서로 불편했던 심기도 털어내게 된다. 광교산 자락의 수지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풍덕천의 토월 마을, 신봉리의 서봉 마을, 고기리의 손기 마을, 성복 마을 등 대부분의 산마을들이 산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고기리의 곡현(曲峴) 마을만이 그 전통을 이어간다. 해마다 칠월 칠석을 전후하여 날을 잡고 광교산 큰골에서 지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 한 마리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는데 요즘은 소머리로 대신한다고 한다. 소를 잡기도 어렵고, 참여 주민도 많지 않아서 생긴 변화이다. 제관과 당주와 축관을 1명씩 선정하고 날이 잡히면 집집마다 황토를 대문 앞에 놓아 부정을 막는다. 각종 동물의 살생을 금지시키는데 특히 어린이들에게 매미나 잠자리도 잡지 못하게 한다. 제사 전날은 산제사 터로 오르는 길을 닦고 제삿날 소를 잡아 저녁에 지내고 고기를 서로 나누었다. 각자의 형편에 맞춰 고기를 가져갔는데 돈은 나중에 내면 된다. 다른 마을의 산제사가 끊긴 지 오래되었으므로 그곳 사람들도 고기를 가져갔었다. 산신의 복을 함께 받겠다는 의미이다. 이 마을도 산제사를 중단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 심한 수해와 산사태로 큰 피해를 본 뒤 부활되었다.
고기리 마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음식점의 난립과 비좁은 도로 형편, 광교산의 동쪽을 관통하는 고속화도로의 건설로 인한 어수선함 등 물 맑고 골 깊은 고기리 계곡이 심한 몸살을 앓는다.
# 12대에 걸쳐 산 고기리의 산증인
고기리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도 고기리를 오가며 밭농사를 짓는 이석순(64)씨를 만났다. 12대에 걸쳐 살아온 사람답게 추억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마을 언저리의 바위들에 얽힌 얘기부터 계곡의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마을 사랑은 시간이 모자랄 정도이다. 그 사랑과 소명의식으로 '수지향토문화답사기'도 펴냈다. 그야말로 수지의 속살을 남김없이 담은 책이다. 고갯길 이름이며, 선인들의 묘역과 마을 노인들에게 들었던 전설 등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재가 하도 많아서 논두렁을 뚫을 지경이었다는 어린 시절 기억과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계곡의 밤 풍경 등도 이씨가 십여년을 조사하고 집필하게 한 원동력이리라. 지금은 수지농협 조합장으로서 지역에 기여하고, 또 도시화된 수지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수지지역독립운동비'를 건립하려고 노력한다.
# 일본을 물리친 두 장군의 묘역에서
고분재 바로 아래 왼쪽 산으로 접어들면 장수 이씨 이종무(李從茂·1360~1425) 장군의 묘가 보인다. 세종1년(1419) 227척의 전함을 이끌고 왜구의 본거지로 알려진 대마도를 정벌한 주인공이다. 요즘처럼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광교산에 누운 장군이 생각나서 고기리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의 최후 기사 중 일부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덕수 이씨 이완(李莞·1579~1627)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큰형인 희신(羲臣)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삼촌을 도와 나라를 구했고, 정묘호란때 순절한 인물이다. 고기리 손의터에 정문과 묘소를 썼는데 올라보니 고기리 입구의 낙생저수지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조부 묘소도 근처에 썼다. 그러나 이완 장군 묘소 바로 뒤쪽 산등성이는 고속화도로 건설로 깎아내는 바람에 낭떠러지가 되어 지맥이 끊겼다. 이제 저 새 길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동차들이 씽씽 달릴 것이다. 일본이 독도에 '불을 지르고' 나 몰라라 내빼는 것처럼.
▲ 원강우주지구박물관
■ 고기리의 숨은 보석 원강우주지구박물관
'서양화가 천영덕 30여년 수집… 운석·원석·화석 1천여점 즐비'
음식점들 틈에서 엄청난 보석을 찾았다. 서양화가 천영덕 선생이 30여년에 걸쳐 수집한 운석을 비롯하여 에메랄드, 자수정, 사파이어 같은 보석의 원석들과 몇 억년의 신비를 품은 화석들이 즐비하다.
수집품 2만여 점 가운데 1천여 점만 전시했다는데도 어마어마한 양이다. 개인이 소장한 관련 물품 중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리라.
과학놀이체험관은 어린이들에게 무한한 상상력과 함께 과학의 원리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빛과 소리의 변화부터 각종 기계의 작동원리도 자세히 보여준다. 별을 바라보기 위한 천체망원경과 각종 차량들도 마당에 가득하다. 천영덕 선생은 그림도 우주의 빛과 물방울 만을 주제로 그린다.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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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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