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년 역사, 인천 기상대를 아시나요'.

올해로 인천기상대의 역사는 104년이 됐다. 1904년 4월부터 관측을 개시한 인천기상대는 목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문을 연 관측소이기도 하다. 불과 2개월 차이로 '최초' 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못하지만 그만큼 인천 기상관측의 역사는 오래됐다. 한국 기상관측의 역사를 얘기하는데 있어 인천 기상대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근대화의 물결속에 문을 연 인천기상대, 그 역사와 의미를 알아본다.

 
 
#천문관측에서 기상관측까지 인천 기상대 104년

인천 기상대는 러·일전쟁이 시작되던 1904년 4월 일본의 칙령에 따라 문을 열었다. 일본은 군사 목적을 위해 인천, 부산, 팔구포(목포), 용암포, 원산 등 5개소에 일본중앙기상대 임시관측소를 개소했다. 현재는 중구 전동 제물포 고등학교 후문 응봉산 정상에 위치해 있지만 임시관측소가 문을 열 당시에는 현재 중구청 뒷길 송학동의 한 허름한 여관을 빌려 관측을 했다고 한다. 그 후 1905년 1월 응봉산 정상에 건물을 신축했고 1910년 8월 조선총독부 관측소로 확대된 후 1939년 총독부 기상대로 개칭됐다. 해방 이후 1948년 중앙 기상대가 서울로 이전될때까지 인천 기상대는 국내·외 기상정보를 수집해 알렸던 우리나라 기상업무의 핵심을 담당해 왔다.

또 초기에는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는 대형 망원경이 관측소에 설치돼 있어 기상 뿐만 아니라 천체 관측 기능까지 겸하고 있었다.

#당시 기상관측은 어떻게 했을까?

날씨 예보가 처음 전파를 탔던 해는 1928년이라고 한다. 라디오 정규방송을 통해 지역 날씨가 전해졌고 이어 어민을 위한 '어업기상방송'도 1931년 라디오전파를 탔다고 한다.

라디오 방송 이전에는 '깃발'이 유일한 일기예보 수단이었다. 당시 일기를 알리는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기상대 꼭대기에 여러 의미를 갖는 깃발을 달아 그날의 날씨를 알린 것이다.

풍향의 경우 삼각형 모양의 깃발에 동풍은 녹색, 서풍은 청색, 남풍은 적색 등으로 표시해 바람의 방향을 알렸고 날씨는 네모난 깃발에 눈이 올경우 녹색, 비는 청색, 흐림은 적색, 맑음은 흰색 등으로 표시해 기상예보를 했다고 한다.

#인천기상대에서 근무했던 카즈코씨 이야기

지난 5월 인천 기상대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1944년부터 4년간 이곳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예보관 카즈코(84·여)씨가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당시 인천기상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정도로 이 곳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기상대에 따르면 카즈코씨는 당시 인천기상대의 건물 구조는 물론 관측기록 등을 뚜렷이 기억했고 지금은 없어진 기상대 지하 서고와 천문관측, 인심좋은 인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지금은 쇠락한 인천기상대

이렇게 지난날 한국 기상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천 기상대지만 지금은 대전지방기상청 소속으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기상청이 재편되면서 대전청에서 인천과 경기도 등 모든 기상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이 전혀 다른 곳에 속해 있다 보니 일반 업무는 물론 기상예보에도 상호협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천기상대측의 얘기다. 현재 인천기상대에서 예보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은 6명. 매일 2교대씩 돌아가야 하는 기상대의 특성상 적어도 8명은 있어야 하지만 이마저도 역부족인 상태다.

인천기상대 관계자는 "변방으로 밀린 인천기상대의 현재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며 "정부나 인천시 차원에서 기상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다시한번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