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들의 즐거운 체험 교육장 선감도

화성시 서신면에서 탄도 방조제를 지나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딸린 선감도에 들어서면 청소년을 위한 문화 체험 공간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어 섬 전체가 청소년을 위한 놀이터라는 생각이 든다. 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설은 청소년들의 영어회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설립된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이다. 이곳은 처음 입소할 때 외국을 방문한 것처럼 공항 출입국관리소의 입소 절차를 밟게 하여 청소년들은 매우 즐거워한다. 그리고 도립청소년 수련마을과 선감 학생수련원도 선감도에 있다. 섬 주변에는 갯벌을 이용한 갯벌체험장이 있어 아이들은 이곳에서 갯벌 생물들을 만나면서 자연을 배운다.

▲ ▶ 선감도 전경. 방조제가 건설되기전 탄도·불도·선감도와 대부도 등으로 나뉘어져 옹진군으로 있던 선감도는 시화방조제 건설과함께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와 청소년수련원 등 문화레저공간을 갖춘 아름다운 해양레저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지만 일제강압시대와 건국 초기에는 도시부랑아가 수용돼 있었고 수용 당시 인간이하의 대우와 시신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있는 등 지난 시절 가슴 아픈 이야기도 간직되어 있다.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섬 입구에 있는 탄도항에는 바다와 어촌, 등대를 체험할 수 있는 어촌민속박물관과 누에섬 등대전망대가 있다. 탄도항 건너에는 지난 6월 세계요트대회와 국제보트쇼가 열린 전곡항이 있다. 전곡항에는 요트를 계류할 수 있는 정박소가 조성되어 있고 항구에는 요트가 떠 있어 아름다운 경관이 연출되고 있다. 더욱이 경기도가 선감도 일대를 해양체험 관광지구로 조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이제 선감도는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레저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식민지 체제에 희생된 아이들이 유폐된 섬. '아! 선감도'

이같이 화려하고 많은 이들이 즐거워하는 선감도가 일제시대 말에는 식민지 체제에 희생된 아이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96년 선감도에 있는 마을 앞 조그마한 야산에서 공동묘지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15세를 전후한 청소년들의 유골이 대량 발굴되었다. 유배되었다가 죽은 아이들의 유골이었다. 2000년 8월 15일 MBC가 8·15 특집극 '선감도'를 방영했다. 양동근이 열연한 이 드라마는 1942년 세워진 선감학원에 수용된 수백명의 청소년들에게 가해진 학대와 혹독한 노동, 그리고 이를 이기지 못해 섬을 탈출하려다 죽음을 당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랑아를 수용한 식민지 사회복지 시설로만 알려진 선감학원의 실상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89년 이하라 히로미쓰가 소설 '아! 선감도'를 출판하고서부터이다. 이하라 히로미쓰는 일제시대 말기 선감학원 원감인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 건너와 섬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이 목격한 내용을 소설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 일제시대 선감학원 모습.
당시 일제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의 후방 군수기지에 해당하는 식민지 조선의 안정적 지배를 위해 도시의 안녕을 위협한다고 판단되는 거리 부랑아들을 계속 격리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942년 개원한 선감학원이었다. 선감학원에는 서울과 경기도의 부랑아들이 수용되었고, 인천·부산감화원과 형무소의 소년 수감생들도 이곳으로 이감되었다. 당시 선감도는 육지와 격리된 섬이었기에 아이들을 유배시키기에는 적임지였다. 이하라 히로미쓰의 표현대로 선감도는 수용된 아이들의 '지옥'이었다. 한때 300여명까지 수용된 아이들은 오전에 황국신민화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가혹한 노동에 투입됐다. 아이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였기에 영양실조 상태였다. 배고픔과 가혹한 환경에 견디기 힘들었던 아이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선감학원은 탈출을 막기 위해 밤에는 옷을 벗겨 발가벗긴 상태로 잠을 재웠지만 탈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간혹 탈출에 성공한 아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육지에서 잡혀 섬으로 송환되었다. 탈출에 실패한 아이들은 선감학원 관사 지하 감방에 감금되었고, 가혹한 체벌을 받았다. 탈출을 시도한 많은 아이들은 육지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물이 들고 날 때 물살이 거세고 빨라 물때를 잘못 계산한 아이들이 익사한 것이다. 익사한 아이들은 마을 앞산 공동묘지에 매장됐다.

 
 
▲ (구)경기도립직업학교. 예술인들을 위한 경기창작센터로 조성될 예정이다.
# 해방 후에도 선감학원은 계속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선감학원에 수감된 아이들은 대부분 섬을 떠났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신생 한국 사회에도 거리의 부랑아는 있었고 이들을 수용할 시설은 필요하였다.

1946년 2월 선감학원은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 고아들로 거리가 넘쳐나자, 정부는 1954년 미군의 지원을 받아 새로 건물을 짓고 청소년들을 수용했다. 수용된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취학했다.

해방 후 선감학원 교사였던 아버지와 선감학원 관사에서 살았고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재원씨는 1950년대 이후 선감학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선감학원에서는 수용된 아이들에게 목공, 재봉, 염전, 농지, 사진, 이발 기술을 가르쳤다 한다. 당시 선감학원 학생들과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신상철 선감마을 어촌계장에 따르면, 당시에도 선감학원에 수용된 아이들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해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을 시도한 이들 중 성공한 이들도 있으나 물때를 잘못 만난 아이들은 익사를 하였고, 이들도 일제시대 선감학원 아이들이 묻혔던 공동묘지에 같이 묻혔다 한다.

선감학원은 1982년까지 지속되다가 폐지되었고, 선감학원 자리에는 경기도립직업전문학교가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선감학원 출신들이 가끔 이곳을 둘러보고 간다고 한다. 선감학원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경기영어마을안산캠프.
# 섬의 79%가 도유지인 선감도


선감도에는 도유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유난히도 많다. 섬의 79%가 도유지이기 때문이다. 섬 주민들은 지금도 농지 대부분을 경기도에서 임대를 받아 경작하고 있다. 도유지가 많은 것은 일제시대 선감학원 건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제시대 말기 선감학원이 건립될 때 주민들은 일제에 토지를 매각하고 섬을 떠났다. 해방 후 주민들이 섬에 돌아왔으나 개인 소유의 땅은 없었다.

5·16 후 박태원 경기도지사가 주민 민원을 청취하고 일부 땅을 주민들에게 불하하면서 섬 주민들은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경기도지사 박태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 보존해야 할 선감학원 건물 "1954년 지은 고아원·관사 남아… 사회복지사·근대건축 중요사료"

▲ 벽돌집.
선감도에는 1954년 미군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선감학원 고아원 건물과 관사 9채 정도가 남아 있다. 이 중 화장실과 일부 관사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화장실은 이중 벽돌로 벽을 쌓고 목재로 지붕을 얹었는데 화장실 내부의 분리된 대·소변 공간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당시 미군이 지은 건축물 양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1941년 건립한 관사도 외부는 일부 변형되었으나 골격은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계속 변형되고 훼손되고 있다. 일제침략사와 해방 이후 한국사회복지사의 중요한 유물인 선감학원 관사와 수용시설은 당장 실태조사에 착수하고 보존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누에섬 등대전망대. 휴가철과 주말을 맞아 행락객들이 갯벌체험과 바다조망을 즐기고 있다.


/강진갑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kanghis@unitel.co.kr
/후원 : 경기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