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은 2008년 7월 31일 '식품등의 표시기준 일부개정안'을 예고하였다. '식품 등의 표시기준'에 따르자면 그 동안에는 수입식품을 포함해 '표시는 지워지지 아니하는 잉크·각인 또는 소인 등을 사용하여 한글로 하여야 하나 소비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자나 외국어는 혼용하거나 병기하여 표시할 수 있으며, 이 경우 한자나 외국어는 한글표시 활자와 같거나 작은 크기의 활자로 표시하여야 한다'고 규정했었다. 식약청은 이 기준에서 한자나 외국어 활자 크기를 한글과 같거나 작게 표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명분은 '규제 완화'다. 한마디로 기업이 일하기 편하게 하자는 발상이다.

▲ 이 건 범 (주)위즈덤하우스 기획위원
사실 이 규정이 있는 지금도 과자나 음료 등의 각종 식품 겉에는 영어가 난무하고 있다. 마치 '옥외광고물에 관한 법률'에서 간판에 한글로 표기할 것을 의무화해도 길거리에는 국적 불명의 외국어 간판이 판을 치는 것처럼. 외국어를 함께 적더라도 한글보다 크게 적어서는 안 된다는 기존 규정을 없애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영어가 커지고 한글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한글 사랑'이나 '우리말글 보호'의 측면에서만 제기되는 게 아니다. '식품등의 표시기준' 제4조에서는 표시 사항을 정하고 있는 바, 단지 식품의 제품명뿐만 아니라 내용량, 원재료명, 성분명 및 함량, 영양성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사항들의 표시 방법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식품의 위생과 안전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국민들에게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불안과 위험을 가중시킬 수 있다. 더구나 외국어에 익숙지 않은 노약자를 생각한다면 감히 할 짓이 아니다.

분명히 법적, 행정적 규제를 완화할 영역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규제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도 있는 법이다. 건강이나 공공성이 걸린 부분은 더더욱 산업화의 물결과 거센 경쟁 논리 속에서 기본 윤리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쥐대가리 새우깡 사건이나 최근의 여러 이물질 사건에서 보듯 식품 회사들은 이물질에 대한 보고 의무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당초 이런 개악 안을 '규제 완화'의 하나로 제시한 식약청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그 식품을 먹는 한국 국민들 눈에는 한글 표시가 큰 게 당연한 일이다. 식품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한글을 모른다면 몰라도, 그건 결코 '규제'가 아니며, 식품 산업의 기본 의무에 불과하다. 아무 데나 '규제 완화'와 '세계화'를 갖다 붙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