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가 진화하고 있다!
80년대 서울의 한 거리에 대치하고 있는 성난 민중과 공권력. 이들 사이엔 서로간 감정은 없어도 집단간 감정과 약간의 도화선만 있으면 피튀기는 내전이 치러졌다.
시위대 대부분은 같은 대학교 학생이거나 같은 단체 소속 등 대부분 서로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인지 선봉에 선 '사수대'는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뒤에 있는 시위대를 보호했다.
전의경들도 방어 장비로 완전 무장했으며, 과격한 시위대 만큼 성난 눈빛에 곤봉을 들고, 그 뒤엔 언제나 최루탄 발사대가 있었다. '백골단'이라 불리던 경찰관 시위 진압대는 대열이 깨지길 기다렸다 쏜살같이 달려나가 이들을 체포했고, 잡혀가던 이들은 바로 이전까지 시위대가 행하던 폭력의 강도만큼 공권력에 당하면서 전경버스로 끌려갔다. 피투성이가 돼 끌려가던 그가 외친다. "독재타도!…."
…2008년 6월. 서울 광화문 사거리엔 어김없이 성난 민중이 몰려 무언가 외치고 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화염병도 쇠파이프도 아닌 촛불과 피켓.
이들은 시위대에 함께 속해 있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교복 입은 학생과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나온 주부들도 많았다.
수십만명이 모였다. 시위대 중 한두 명이 전경버스 차벽 뒤의 전의경들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고 욕설을 들은 군중들이 이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여있다보니 인근을 지나던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보니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과격해졌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최초의 그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해 모여있다고 말했다.
과격한 욕설이 오갔던 것도 눈깜짝할 새였다. 전경버스를 발로 차는 사람, 전의경들을 위협하려는 사람 등 성난 군중이 과격해지려는 순간 시위대 안에서 또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폭력은 안됩니다."
시위가 진화하고 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대치하던 거리 시위가 촛불과 피켓으로 바뀌었다.
시위대에 맞서 대치하고 있던 20대 초반의 앳된 의경 한 명에게 시위대의 한 여성이 생수병을 건네주며 마시라고 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시위가 얼마만큼 진화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폭력, 과거 과격일로를 걷던 시위의 패턴과 강경 진압으로 응수하던 정부의 대응 방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최소한 서로를 이해하는 범위내에서 각자의 맡은 임무를 하고 있다.
우리 사회 시위문화, 언제부터 어떻게 서서히 변화돼 왔는지 그 맥을 찾아본다.
#근대한국, 집회 시위의 시작
우리 국민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최초 집회시위라 하면 범민족 항일 독립운동인 3·1운동을 뽑을 수 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말이다.
이후 광주학생 항일투쟁운동과 한국전쟁을 거친 뒤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사건 이후 나타난 4·19혁명은 이 전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과 내각제 전환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에 정부에선 4·19 이후 혼란한 정치상황과 대중의 집회시위가 계속되자 집회 시위의 자유를 일정부분 명문화하기 위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단일 특별법을 제정했고, 여기까지를 근대사에서는 집회시위의 태동기라 보고 있다.
#집회 시위의 전성기
박정희 정권의 5·16 군사 쿠데타. 당시 박정희의 군사정부는 거의 모든 집회나 시위를 제한하는 집회에 관한 임시 조치법을 공포했고 이로써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집회는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된다.
군사정권은 정치적인 민주주의보다는 정권을 필두로 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모토로 하고 있어 집회 시위에 대한 자유는 크게 침해하는 행태를 보였다. 특히 1962년 헌법 개정으로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인정했으면서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선 시위 자체를 규제하려고 했다.
이런 군사정권의 민중의 자유 침해는 민주주의를 점차 압살했고, 박 전 대통령 피살 이후 12·12사태를 겪으면서 응집했던 투쟁의 의지는 폭발하듯 일어나는 듯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경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군사정권은 쿠데타에 대한 명분을 얻기 위해 훨씬 더 잔인한 대응을 했고, 이를 비난하는 시위대와 제압하려는 군 간의 끔찍한 대치는 계속돼 왔다.
권력이 전 전 대통령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는 그동안 억압돼 온 민주화 열망이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오히려 더 성장해 올 수 있었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명분있는 집회 시위의 전성기를 이룬 80년대 시위 특징을 보면, 6월 항쟁과 같은 대규모 광장집회와 거리 시위가 주를 이뤘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에 대항하던 민중의 표현 방식은 분신정국, 가두투쟁, 점거, 방화, 화염병 투척 등이었다. 이 때문에 화염병·쇠파이프·머리띠·마스크·선전물과 풍물패·노래패 등의 문선단, 앰프와 마이크를 장치한 선전차량 등의 시위품목도 이 당시 처음 등장했다.
이같은 당시 민중의 표현방식은 한마디로 폭압에 대항하는 폭력적 항쟁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같은 시기 반전이나 환경을 부르짖던 외국의 평화적인 시위대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
#집회 시위의 다양화 과도기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군사정권의 통치 말기부터 문민정부의 출범과 김대중 정부까지 집회 시위의 문화는 또다른 변환기를 맞게 된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끊임없이 등장했던 '군사정권 타도'라는 외침은 자취를 감추고, 집단 민원성 시위와 노사 분규, 이익집단간의 다툼이 주를 이뤘다는 것이다.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고용 위기는 노동운동의 과격양상을 이끌어 냈다.
90년대 중반 이후 YMCA·경실련·참여연대 등과 같은 시민사회단체의 출현은 또다른 집회 시위 방식을 만들어냈고, 전문가의 식견이 뒷받침되는 캠페인과 토론회, 기자회견 등이 가두집회 등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후 집단이 주가 되는 시위 문화는 1인 시위, 침묵시위, 퍼포먼스 시위 등으로 변모했고, 언론의 다양성과 자유 보장은 이들 소수의 목소리에도 어느 정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과거 군사정부 시절 반독재나 민주화 요구 등에 대한 시위가 전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문민정부 이후 시위대의 논리는 주로 노사 갈등과 이권단체간 갈등에 기인하면서 집회 시위에 대한 다수 국민의 반감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보혁 갈등에 따른 언론의 보수화를 이유라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으며, 시위에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민주화에 따른 다양성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집회 시위의 안정기
선진국들이 그랬듯 과격하고 폭력적인 시위 행태는 그 과도기 등을 거치면서 점차 평화적 시위 정착 단계로 가고 있다. 특히 가장 큰 변화는 이젠 집회 시위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는 것이다. 과거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없을 때는 주변 사람들부터 관련 단체에 속한 사람들까지가 대부분 시위대 구성원이 됐지만 최근엔 온라인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도 참여유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평화시위의 대명사가 된 촛불집회는 이제 더이상 집회라는 단어보단 촛불 문화행사 등으로 순화되고 있는 것처럼 평화 일색으로 변모하고 있다.
촛불집회의 시작 시점에 대해선 이론이 많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들이 희생당한 뒤 불같이 일어난 반미 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
이후 플래시몹이나 퍼포먼스 같은 행위 중심의 시위가 대중들의 눈길을 끈다는 점을 인식한 시위 주체들은 문화행사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즐기는' 시위문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했고, 대통령 탄핵과 이라크 파병, 한미FTA 등 전국적인 이슈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80년대를 수놓던 민중의 항쟁이 대규모 평화집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계의 불합리한 구조와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으나 아직 존재하고 있는 사회 부조리 등은 평화적인 시위대를 한순간에 과격한 군중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최근 100일을 넘긴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의 경우 미국산 쇠고기 수입관련 장관 고시가 관보에 게재되면서 정점을 찍은 시위대 수가 장마와 올림픽을 거쳐 점차 줄어들면서 경찰의 대응 방안 또한 강경방침으로 돌아서면서 오히려 소수에 의한 과격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네티즌 권력화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산으로 1인 미디어가 권력을 갖기 시작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학계에선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의 힘을 대중이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데 주목해 오기도 했다는 건 이같은 상황을 방증하는 것. 이같은 네티즌의 권력화는 사회적인 이슈를 생산하고 유포하는데 일조하기 시작했고 이같은 네티즌의 특성은 집회 시위문화와 접목되면서 또다른 파워를 가지게 됐다.
최근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에는 포털 다음의 아고라 광장 네티즌들이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서 촛불집회를 이어가기도 했으며, DC인사이드 한 갤러리 네티즌들은 돈을 모아 촛불시위대에게 김밥과 물을 사다 제공하기도 했다.
포털 등에서 이뤄지는 토론 문화가 특정 세력을 만들고, 이슈에 대한 대응 방침에 뜻을 모은 이 세력들이 인터넷을 통해 뭉치면 어김없이 오프라인 시위로 이어졌다. 특히 특정 언론에 반감을 품은 네티즌들은 인터넷을 통해 한 목소리를 내는 세력들을 규합한 뒤 이들 언론사에 광고를 주는 업체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확산시키기도 했고, 이같은 캠페인은 어김없이 네티즌 파워를 보여줬다.
#집회 시위 나갈 길
시위대가 다양한 이슈에 대해 무기를 버리고 평화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민주화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위가 대중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게 아니라 퇴근 후 잠시 들러 즐긴 뒤 귀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불과 20년도 안된 사이의 변화다.
아직까지도 사회 부조리와 권력에 대항하며 집회 시위를 이끄는 조직들이 많지만 이들 또한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으며 과거 군사정권 당시 그랬듯 좀더 나은 우리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몸짓이라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싸우고 깨지면서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해 간다면 촛불집회가 1천일이 될지언정 이 또한 아름다운 몸짓이 될 것이다. 다만 노사간, 정부와 민중간 서로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인다면 평화적인 집회 시위는 점차 굳건히 거리에 정착할 것이다. 최루탄 연기가 사라지고 촛불이 밝혀진 거리의 최근 모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