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를 만나다(7월1일)

광개토대왕비 등 우리 민족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고구려문화를 만나기 위해 대장정단은 단둥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30분을 달려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도착했다.

긴 버스여행으로 모두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우리 민족의 위대한 수호신 '광개토대왕비'를 만난다는 설렘에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한걸음 한걸음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버스에서 내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조선족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점심식사로 나온 불고기가 우리 입맛에 맞았고, 상추와 쌈장까지 덤으로 나와 여기저기서 '한 그릇 더'를 외쳐 식당 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이곳에서의 식사가 일정 동안 최고로 맛있고 즐겁게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많은 학생들이 건물 내 자리한 광개토대왕릉비석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했지만 중국 직원들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점심식사 후 광개토대왕비에 가기 전 압록강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 주변에는 북한군 초소와 몇 개의 건물, 타이어 공장 하나가 세워져 있어, 작금의 굶주리고 헐벗은 북한 실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원정단의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가이드는 "전쟁이 일어날 때 북한으로 넘어오는 적군을 더욱 쉽게 섬멸하기 위해 벌목 등을 했다"고 설명했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스산함과 숙연함이 역력했다.

지안은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태왕릉 등 많은 문화 유산이 남아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이다. 역시나 한국인이 못내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고구려의 수도. 역사상 최고 번성했던 시기의 수도를 찾는다고 하니 이미 가이드의 입은 닫힐 줄 몰랐고 단원들의 눈빛은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 국내성의 돌무덤.

지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역시 광개토대왕비였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의 역사를 알려주는 광개토대왕비는 유리건물 안에 세워져 있고 높이 6.39, 너비는 1.38~2로 한국 비석 중 최대로, 모두 1천800여자 중 1천600여자만 해독 가능하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광개토대왕비가 유리벽 안에 있는 것을 보니 만주 벌판을 넘나들던 광개토대왕의 광활한 꿈과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갇힌 것 같아 마음이 저려왔다.

▲ 국내성 중심에 위치한 장군총. 장군총을 본 것으로도 충분히 우리 선조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가이드는 또 뉘어있던 대왕비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이끼가 끼는 등 훼손이 심각했는데 가까스로 복원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비석에는 당시 여러가지 상황과 관련해 갖가지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글이 쓰여 있었다.

이때 기관원으로 보이는 중국인 직원이 방탄유리 주변을 감시하며 관광객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중국 직원은 유적지 내부의 사진 촬영을 일절 금지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국에서 온 40대 남성이 광개토대왕비를 향해 절을 하자 기관원이 다가와 이를 강력히 제지하기도 했다.

장수왕릉으로 뒤늦게 알려진 장군총에 오르니, 멀리 광개토대왕비가 서 있는 곳과 국내성이 보인다. 생전에 자신의 묘지를 만드는 고구려의 풍습을 고려할 때, 죽어서도 고국과 부친을 보살피려 했던 장수왕의 의지가 엿보인다. 장군총및 대왕비의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후손들은 그저 이곳을 관광코스로만 생각하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 허물어진 광개토대왕릉. 중국정부의 관리부실로 인해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훼손된 것을 직접 목격해도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이곳 국내성 고구려 유적들은 지난 2004년 유네스코에 등록돼 관리되고 있다. 실제 유적들 중 상당수는 조약돌과 바위, 흙 등을 섞어 만들었다.

이 국내성 안에만 7천600여개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놀라워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그 규모나 크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대장정단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태왕릉은 사진으로 봐 왔던 규모만큼이나 높고 넓었다. 장군총과 같이 그 안쪽 곳곳을 둘러볼 수 없었지만 선조들의 기개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태왕릉은 장군총과 불과 600가량 떨어져 있었다. 육안으로도 태왕릉에서 장군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버지인 광개토(호태)왕과 함께 하고픈 아들 장수왕의 효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개의 능(陵)을 보며 영험함까지 느꼈다.

▲ 광개토대왕
현장을 직접 보면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정부는 이미 지난 2004년부터 동북공정에 따라 고구려를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규정, 고조선시대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한민족의 활동공간이었던 백두산의 주류세력도 한민족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바꾸는 등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숨결을 떼어내고 있다.

중국의 전략지역인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 관련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가 통일되었을 때 일어날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목적인 동북공정에 대해, 광개토왕릉을 진시황릉으로 잘못 알고 발굴하다 이 사실을 독일인 사진기자가 발견, 서양학계에 퍼지게 되자 중국이 시도하려 했던 동북공정이 실패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의 우리역사 약탈에 대한 심각성도 자각해야 할 것 같다.

장경만 단장은 "13억 중국인들에게 '100년의 꿈'으로 여겨진 베이징올림픽이 무사히 끝났다. 학계에서는 이제 대외 위상이 급상승한 중국이 '역사전쟁'을 펼칠 것이라는 전망이 부상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하기 위한 대책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