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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시 중대동 텃골.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광주 안씨들의 묘소 수십기가 자리하고 있고 이백오십여년전 順庵 安鼎福선생이 문하생들과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목소리가 골짜기마다 가득 울려 퍼지던 곳이다. 텃골이라는 이름값을 하듯 광주 안씨 묘역과 연립주택과 빌라들이 어울린채 아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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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를 가로지르는 3번 국도변 장지IC에서 성남 방면으로 3㎞ 남짓 우측에 중대동(中垈洞)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경안면 중리(中里)와 대동(垈洞)에 해당하였고, 일제강점기 당시 중대리로 합쳐졌다. 이후 몇 차례 행정구역 개편 끝에 현재는 행정동인 광남동의 6개 법정동 중 하나이며, 텃골은 그 중심 마을이다.
텃골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장산(靈長山) 자락 광주 안씨 묘역 수십 기이다. 마을의 터줏대감은 단연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91)이다. 조선후기 이익을 계승한 실학가로서의 명성뿐만 아니라, 거주 시기는 물론 묘역도 영장산 자락 중턱이니 말이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총론에 "안정복은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전념한 500년 이래 유일한 사학 전문가-동사강목(東史綱目) 집필:필자 주-이다. 지리의 잘못을 교정하고 사실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 가장 공이 많았다"라는 언급에서 치밀하고 꼼꼼한 역사학자였음이 확인된다.
순암이 광주와 연고를 맺는 시기는 조부 안서우(安瑞羽)가 타계한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년)에 부친인 안극(安極)과 함께 세거지인 덕곡(德谷·현재의 텃골)으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순암의 사상이 만개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 중의 하나는 문하생들이 학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 장으로 1761년에 설립한 강학소에 힘입은 바 크다. 이곳에는 본채 이택재(麗澤齋)와 함께 영장문(靈長門:대문), 사숙당(思肅堂) 등이 있다.
안정복의 경우, 광주가 본관이라는 점, 텃골에 정착한 이후 관직에 나갔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묻혔다는 점, 그리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과 함께 실학을 대표하는 '광주학파'의 주요 인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실학박물관 결정, 그리고 넋두리(?)
이제 순암 탐구를 잠시 멈추고 시간추를 2000년대에 맞추어 보자. 불과 몇 년 전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실학박물관 설립 계획을 세울 당시 광주, 남양주, 안산 등 3개 시는 박물관 유치에 올인하는 추세였다. 결과는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남양주시 마재마을로 결정됐다.
문화정책은 '역사적 연고성'에 비중을 두고 입지조건, 도로망, 문화 인프라 시설 등 종합적으로 판단, 결정돼야 이후 그 후유증을 최소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확정된 정책에 다시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광주 곳곳을 조사하고 관련 문헌을 볼수록 광주와 실학과의 연관성이 넓고 깊었음을 확신하는 역사학자의 넋두리 정도로 해 두자.
여기에 이익의 고향(월곡면 첨성리)이 당시 안산군이냐 광주군이냐는 학계의 논쟁, 박물관 부지로 선정된 다산의 고향인 조안면 능내리도 원래 광주군 초부면이었다는 점, 그리고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이자 실학자들의 주요 회합처가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자락(천진암)이었다는 점 등도 광주가 새로운 사상을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곳임을 웅변해 준다.
광주 향토 문화에 해박한 박광운 향토문화연구소장의 경기도지사에 대한 항의 메일과 계속되는 문제 제기에 말없이 동조하는 힘없는 역사학자의 처지에 자괴감을 느낄 뿐이다.
# 전통 마을에 들이닥친 공장, 연립 및 전원주택
영장산 자락에 병풍처럼 오붓하게 들어선 텃골에도 변화의 바람은 거세다. 굴다리 앞의 '중대1동 텃골'이란 푯말 주변에서 그 단초가 드러난다. 인근의 대형 물류창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 스튜디오, 그리고 중소공장도 부지기수이다. 여기에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로또복권을 사는 일까지도 흔한 풍경이다.
마을 안쪽으로 가다 보면 ○○빌라, △△주택 등 5층 안팎 규모의 건축공사는 항시 진행형이다. 안씨 묘역 위쪽까지 쭉 이어진 다양한 규모의 전원주택도 꼬리를 물고 건립되고 있다. 그만큼 이곳이 지리적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외부에서 불어오는 개발의 바람은 전통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중대동도 예외일 수가 없다. 비석군 앞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50대 아주머니는 "이곳에 공장이 들어선 지는 10년이 넘었지만 빌라와 연립주택, 전원주택 등은 거의 다 최근에 들어섰다"며 마을의 빠른 변화상을 증언한다.
# '이택(麗澤)'의 현대적 계승
마을 밖에서 분 개발 바람에도 그 자리에서 수백 년을 지켜온 것은 묘역과 비석만이 아니다. 이택재 30 앞 고목은 오랜 마을 역사를 증명하며, 경외시하는 신앙대상임과 동시에 쉼터로서 기능했으리라. 한편 30여호 남아 있는 광주 안씨의 종손 안갑환을 비롯하여 광양군(廣陽君)파 종중 관련 인사는 마을의 전통문화를 간직하면서 방문객을 묵묵히 맞이한다.
광주 안씨 문화유적을 몇 차례 조사하면서 궁금했던 것이 '이택'이란 현판이었다. '역경(易經)'의 '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이라는 구절에서 처음 쓰였다는 이 말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쓴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최근 3개월 사이에 관내 경화여고 3학년인 박은경 학생과 순암에 대한 다양한 사료, 단행본, 논문 등을 놓고 긴 시간 동안 때로는 연구지도, 때로는 상호 토론 과정을 거쳤다. 학생은 한 편의 순암 관련 보고서를 완성하였고, 2008년 여름 국사편찬위가 주관한 '우리역사바로알기(전국 중·고등학교 대상) 대회'에 응모, 본선인 논술시험을 거쳐 장려상을 받았다. 33인에 들었으니 옛날로 치면 과거에 급제한 셈이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수험생이 걸어서 족히 40분은 걸리는 산 중턱 묘역을 찾아보고, 거기에 자신의 사상을 A4 20장 분량의 보고서로 작성한 것에 대한 순암의 보답(?)이었는지, 학생은 1학기 수시에서 건국대 인문학부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토론과정에서 필자는 학생의 열정과 진지함을 느꼈고, 학생은 사료 선택과 해석, 글짓기 요령을 배웠다면, 이것이 바로 이택의 현대적 계승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 한가위, 三代의 풍성한 소통문화를 위하여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누구나 전통의 무게감에도 방점을 두어야 하고 현대의 빠른 변화에도 함께 탑승해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전통과 현대의 소통부재를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전근대에서 현대 사이에는 서찰로 교류했던 순암 세대의 인편(人便) 문화, 우표에 침을 발라 누군가에 소식을 전했던 조부모 세대의 우체통 문화, 그리고 문자(메일, 동영상 등)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로 진화되었다. 인편 문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거의 사라졌지만 우체통과 디지털문화는 여전히 공존 중이다.
이 글이 지면으로 나올 때면 고향 찾기와 조상모시기 행렬이 거리에 가득찰 것이다. 많아야 1년에 두세 차례 정도 조우하는 우리 내부의 세대간 대화는 얼마큼 이어질까. "안녕하셨어요?"라는 손녀·손자의 인사말에 70대 조부모가 "잘 있었느냐, 공부 열심히 하지?"라는 1분 응답 뒤에 긴 여백은 없는가 말이다. 삼대를 잇는 쌍방향 소통문화가 가득 넘치는 한가위였으면 좋겠다. 물질적 여유보다는 정신적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의 풍요로운 보름달에 그 기대를 담아본다.
"순암 할아버지! 평생을 관철했던 역사의 책임감 잠시 뒤로 하시고 텃골에 인사온 후손들과 명절 잘 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