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14년 도입돼 개인의 재산권 행사에 있어 신뢰를 담보하는 수단 중 가장 유용하게 사용됐던 인감(印鑑).

신용 및 공증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시절에 인감은 저렴한 비용과 간편한 절차로 개인의 경제활동시 본인의 의사를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통용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맞아 아날로그의 상징성이었던 인감은 설자리를 잃고 있는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인감을 발급받으려면 본인이 직접 거주지 주민자치센터(옛날 동사무소)에 나가 신고를 해야하는 번거로움 등으로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인을 선호하고 있다.

■ 인감은 사라지고 사인이 뜬다

회사원 윤상준(38)씨는 최근 그토록 갈망하던 내집을 마련했다.

결혼한지 12년만에 수원시 영통구에 조그만 아파트를 마련한 윤씨는 집 계약하는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난달 23일 부동산에서 계약을 한 윤씨는 인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중개사의 말에 의구심이 들었다.

윤씨는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당연히 인감이 필요할 거로 생각해 부인것까지 챙겨 갔으나 사인만 해도 된다는 말에 세상이 변했다는 걸 실감했다. 윤씨는 "어렸을때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 만든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며 "당시에는 인감이 생겨야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선아(44·여)씨도 최근 은행에서 2억원을 대출받으면서 대출신청서에 인감대신 사인을 했다. 김씨는 억대의 돈을 대출받아 사인 대신 인감을 사용하겠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대부분 인감대신 사인을 한다는 은행직원의 설명을 듣고 사인을 하고 대출을 받았다.

김씨는 "인감없이 대출이 가능해 편한 세상같다"며 "그러나 자기 인감을 사용해 도장찍을 때의 기분이 사라지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고 웃었다.


■ 범죄에 이용되는 인감

"위임장 작성하시고, 본인하고 대상자 신분증 2장에 위임장에 도장만 찍어오면 됩니다."

오모(33)씨는 우연히 동사무소에서 다른사람의 인감을 사용하려면 위임장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했다. 오씨는 그후 지난 2004년 동사무소에서 다른 사람 명의의 인감증명을 발급받아 은행에서 2억8천여만원을 대출받은 뒤 그대로 달아났다.

인감증명법이 바뀐 지난 2003년부터 이처럼 인감도장이 없더라도 증명서를 쉽게 발급받을 수 있어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또한 법정다툼도 증가하고 있다.

은행 측은 동사무소가 본인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증명서를 발급해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고, 이에 2심 법원은 인감증명을 사용한 당사자인 은행에 100% 책임이 있다고 봤지만, 대법원은 오히려 담당 공무원의 책임이 크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공무원은 자신이 떼준 인감증명이 부정한 용도로 쓰이는 걸 막을 의무가 있는데 이를 소홀히 한 점이 인정된다는 법원의 판결이다.

조성준 변호사는 "담당 공무원으로서는 권한없는 사람에게 인감증명이 발급되지 않도록 본인 확인 등의 절차를 철저히 거쳐야 한다는 취지다"며 "최근엔 일부 지자체들이 인감증명을 발행하면서 전자지문을 받는 등 법원의 이번 판결로 본인이나 대리인 확인 절차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모(43)씨도 지난 3월 다른 사람 명의의 인감증명을 발급받아 저축은행에서 5천만원을 대출받아 유흥비 등으로 탕진해 경찰에 구속됐다. 최씨는 당시 경찰진술에서 위임장만 있으면 인감증명을 발급해 준다는 말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 인감제도 혁신

정부는 최근 인감증명에 대한 사건이 속출하자 공공기관에서의 인감증명 요구를 줄이는 등 현행 인감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금융거래 등에 인장보다 서명문화가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인감증명제도로 인한 행정력 낭비와 민원인 불편이 적지 않고, 특히 수시로 발생하는 인감증명 위·변조에 의한 사건사고는 신용사회를 지향하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에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개인 간 경제 및 사회활동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사적 자치'라는 자유민주주의 대원칙에도 반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에 행정안전부는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법령, 조례ㆍ규칙, 훈령ㆍ예규 등의 각종 규정은 물론 업무처리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사례를 전수 조사해 이를 통해 사안별로 인감증명 요구가 반드시 필요한지 재검토한 후 필요성이 낮거나 다른 수단으로 대체 가능한 경우에는 인감증명 요구를 없애기로 했다.

현재 전국 읍ㆍ면ㆍ동 사무소에 등록된 인감신고인은 3천13만4천명이며, 전국 시ㆍ군ㆍ구 본청 및 읍ㆍ면ㆍ동사무소 3천12개 증명청에서 지난해 약 4천700만 통의 인감증명서를 발급했다.

조 변호사는 "그러나 아직 대다수 국민들에게 낯선 공증이나 전자서명제도 등의 실시로 인한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치밀한 대책이 필요하다"며 인감폐지의 신중함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