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의 불빛과 자동차의 전조등이 질주하는 수원시 영통동. 그러나 도청 소재지가 있는 수원이라는 대도시에 인접했음에도, 영통지역은 1960년대말까지도 농촌생활의 공동체를 유지했었다. 삼성전자와 경희대가 들어서면서 변화가 시작된 영통지역은 도시기반 시설과 문화공간의 부족이라는 지적속에서 이제 수원의 동쪽을 담당하는 한 축인 영통구로 변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 마을의 흔적을 찾기 힘든 영통


수원 동남부에 위치한 영통동은 396만6천㎡ 넓이에 고층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10여만 명이 모여 사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이다. 영통은 행정구역상 수원시 영통구 영통 1동과 2동을 가리킨다. 영통이 구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영통 1동과 2동을 영통으로 부르고 있다. 영통은 도시 한 가운데를 왕복 12차로의 넓은 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뚫려있고, 그 동서로 아파트가 들어서 있으며 중앙에 상가가 조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도시이다. 다소 삭막한 아파트단지이지만, 아파트 이름은 다른 지역과 달리 신나무실, 살구골, 벽적골, 황골과 같은 이름이 붙여져 있어 정겨운 고향마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외지에서 이주하여 영통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이 명칭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음을 아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다. 영통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전 마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파트와 거리 이름에만 옛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 택지개발되기 전의 영통 모습

# 탐진 최씨 집성촌 신나무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영통에는 신나무실, 벽적골, 느티나무골, 황골, 뒷골 등으로 불리는 여러 마을이 있었으며, 여기에 54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살구골은 지금 영통7단지 살구골 아파트가 들어선 곳으로 살구나무가 많은 골짜기라서 붙여진 이름이며, 벽적골 역시 현재 벽적골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으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벽돌을 구워가면서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영통의 여러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은 신나무실인데, 동산말·넘말·응짓말·샘말·아래말 등으로 불리는 자연마을과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나무실의 지역적 범위는 매우 넓어 현재 신나무실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을 포함하여 태장동과 삼성전자 공업단지가 입주해 있는 지역까지 포함된다. 신나무실은 탐진 최씨 부호군파 집성촌이다. 개발되기 전 탐진 최씨 30여 호 180~240명이 살고 있었다. 물론 신나무실에도 탐진 최씨가 아닌 다른 성씨도 살았으나 탐진 최씨가 오랫동안 살았고 인구도 많아 탐진 최씨가 마을 일을 주도하였다 한다.

주민들의 주업은 농사였다. 1990년대 초까지도 한 울타리 안에 3~4대가 사는 전형적인 대가족제를 유지하였으며 결혼과 출산으로 가족 수가 늘어나면 분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나무실 마을은 매년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의식으로 우물 고사와 대동제를 지냈다. 우물고사는 음력 7월 마을사람들이 모여 우물을 청소하고 준비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낸 후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잔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대동제 역시 여름철에 지냈는데 바쁜 농사 일정 속에서도 하루를 정해 주민들은 술과 음식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였다('수원의 동족마을'참조).

▲ 현재 남아있는 옛 가옥들

# 영통 변화의 두 가지 계기: 삼성전자단지 입주와 영통택지개발

대도시 수원에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농촌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던 영통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마을 서쪽에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입주하고, 삼성전자 남쪽에 하청업체가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신나무실 마을의 농경지 일부가 삼성전자 건립 부지에 들어가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농지를 팔았고,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영통 사람들이 삼성전자와 그 하청공장에 취직을 하면서 경제생활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편 1970년대 말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가 영통 동쪽인 용인시 서천에 들어서고 1980년대 초 개교하였으나 영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경희대 학생들이 영통 건너 서천리 마을에서 주로 하숙을 하고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통이 완전히 변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다. 영통지구에 10만 여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택지가 조성되면서 부터이다. 1993년 말부터 토지 수용이 이루어졌으며, 개발단지에 포함된 마을의 주민들은 영통 단지 내 아파트와 주택단지, 상가 등을 분양받기로 하고 살고 있던 농토와 택지를 팔고 모두 마을을 떠났다. 아파트 입주가 시작된 것은 IMF 사태로 인해 전 국민이 고통을 받던 1997년부터이다.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후 영통동은 공간 구조가 완전히 바뀌어 이전 마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청명산에서 발원하여 병점 쪽으로 흐르던 작은 실개천조차도 사라졌다. 다만 영통 벽적골 아파트 건너에 40~50년 된 신나무실 마을 당시 집이 세 채 보존되어 있어 당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나, 이 건물들도 영통 아파트 단지 길 건너에 위치하고 있어 보존될 수 있었다.

▲ 당산제 보호수

# 마을은 사라졌으나 주민들은 계속 영통에 살고 있다

마을은 사라졌으나 마을 주민들은 다시 영통에 모여 살고 있다. 아파트와 택지, 그리고 상가를 분양받은 주민들이 단지가 조성된 후에 그대로 들어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나무실에 오랫동안 거주하였고 지금은 탐진 최씨 부호군파 종친회 일을 보고 있는 최해성(57)씨는 탐진 최씨 집안도 영통 내에 50호 이상이 살고 있으며, 농토가 사라졌기에 중장년층과 젊은이들은 자영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마을의 어른들은 이제 60~70대 노년층이 되었는데 삭막한 아파트촌에서 특별한 소일거리 없이 지내고 있다 한다.

▲ 옛지명 표지판.

# 간판이 아우성치는 영통 거리

분당·일산·평촌과 같은 신도시와 택지들이 베드타운인데 반해 영통은 자족형 도시이다. 삼성전자와 그 하청업체, 그리고 경희대학교가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 중 많은 수가 삼성전자와 그 하청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아파트 주차장에는 유난히 SM마크가 달린 자동차가 많다. 영통동이 자족형 도시이기는 하나 아파트 밀집도가 다른 신도시보다 높아 쾌적한 환경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영통 거리를 가장 어지럽게 하는 것은 무질서하게 난립한 간판과 도시 사인물들이다. 영통 중심 상가를 가보면 그야말로 간판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2007년부터 도시 공공디자인이 한국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영통에는 아직도 공공디자인 바람이 불고 있지 않다. 영통의 아파트 외양은 거의 똑 같다. 고층 아파트에 지붕은 삼각형으로, 아파트 벽은 요철형태로 마무리 하였다. 심지어 어린이 놀이터 놀이기구도 거의 비슷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10여만 명이 사는 영통에 문화시설로는 도서관 하나 있을뿐, 공연장과 전시장 한 곳도 없다. 그리고 등산 클럽 외에는 눈에 띄는 주민 공동체 모임도 없다.

다행히 2005년부터 400~500년 된 느티나무 앞에서 영통청명 단오제가 열리고 있다. 올 해로 4회째를 맞이하는 단오제가 마을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린 영통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느끼게 해주고, 주민들의 공동체 생활을 읽게 해준다.

/강진갑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 kanghis@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