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려어 물 넘어간다. 배뜸에 초열이라 열에 하나 열에 둘 열에 셋…. 스물이라 막내 딸 시집가기 늦었네, 스물 하나라 스물 둘이요. 스물 셋인데…. 서른이요 노총각 장가가기 늦었네…."
단조로우면서 힘든 노동을 하며 불렀던 '물푸레 노래'에는 외진 곳에 와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다 혼기를 놓친 총각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사암리에는 광산회사 사무실과 사택이 들어섰다. 사무실은 지금도 과수원에 남아 있는데, 집 주인이 집을 고쳤다 하니 사무실 원형이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택만으로는 모자라 집집이 외지에서 온 기술자와 잡부들이 세들어 살았다. 그리고 농사짓던 주민들도 광부가 되었다. 그러면서 마을 분위기도 달라졌다. 보름과 말일 간조 받는 날이면 마을은 흥청거렸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시골인데도 술집이 많았다. 사암리는 용인에서도 큰 도박판이 열리는 것으로 이름났다. 1934년 4월 14일자 조선중앙일보에는 사암리에 사는 가정주부가 농사짓는 남편과 6살 된 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살다 간통죄로 피소되는 사건이 보도되었다. 남편이 성불구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검사에게 항변하자 검사가 남편의 성불구 여부를 조사하였다는 웃지 못할 기사이다. 당시 마을 분위기를 엿보게 해주는 기사이다.
| ||
▲ 사암리 헌산중학교 뒷산의 폐돼된 금광. |
해방 후에도 금광 채굴은 계속되었다. 사암리에서는 석금과 사금이 모두 채굴되었는데, 사금은 물가나 물 밑의 모래 또는 자갈 속에 섞여 있는 금이고, 석금은 돌에 박혀 있는 금이다. 사암리에서 태어나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윤근섭(67)씨는 해방 후 사암리에서 다시 금광 채굴이 활발해진 것이 1960~70년대 전후라고 하였다. 이는 경기도와 용인군 통계연보에도 실려 있다. 사암리 석금은 지표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많이 있었기에 비 온 뒤 사암리는 특히 분주했다고 한다. 지표면이 비에 씻겨 내려가 땅을 조금만 파면 금광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 온 뒤에는 서울에서도 기술자들이 내려왔다 한다. 지역주민들이 들에서 금을 채굴하여 생계에 보태기도 하였고, 일부 주민들은 금광 일을 보다가 금이 나오면 몰래 집에 가져가서 팔아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 되살아난 경관과 건축가 승효상
금광 채굴이 끝나면서 사암리는 다시 한적한 농촌 마을로 변하였고,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사암리는 지금과 같은 경관을 지니게 되었다. 지난 5월 조용한 사암리 마을과 관련된 두 개의 뉴스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 국민만이 아니라 세계 과학계가 주목하는 뉴스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사암리 경관을 바꾸어 놓을 뉴스이다. 전자는 한때는 국민적 영웅이었다가 줄기세포 실험결과를 조작하였다고 비판받은 황우석 박사 연구진이 개 복제에 성공하였는데, 이 연구가 사암리에 있는 수암생명공학연구원에서 이루어졌다는 내용이다. 황 박사 팀은 복제1호 개의 이름을 연구원이 용인에 있는 것을 감안, 용의 순수 우리말인 '미르'에서 따와 '미라'라고 명명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후자의 뉴스는 승효상씨 등 6인의 건축가가 '거주 풍경' 전을 열었다는 소식이다. 이 전시는 2009년 하반기 사암리에 세워질 53가구 타운하우스 디자인을 발표하는 장이었다. 타운하우스 건축을 담당할 건축가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이기에 사암리 경관과 어울리는 건축을 설계하였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사암리는 그 자체가 자연과 주민이 조화를 이루며 빚어낸 건축작품이기에 더 이상 인공적인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강진갑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 kanghis@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