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국화를 샀다. 꽃잎이 작은 노란 소국이다. 받아 든 내자는 꽃만큼 환하게 웃었다. 집안 가득 국향이 배었다. 아! 작은 국화 한 다발이 가을을 불러오는구나.

옛 어른들은 모양새나 빛깔, 향기 등 외부적 기준으로 꽃을 보지 않고, 꽃이 지닌 정신적 기준에 따라 꽃을 가까이 했다. 꽃에게도 품격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평생 꽃을 좋아한 조선 세조 때 문신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이라는 책에서 꽃과 나무를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치자꽃, 동백꽃, 사계화 등은 깐깐한 기골, 모란과 작약은 부귀, 해바라기·두충은 충(忠)과 열(烈), 박꽃·맨드라미·봉선화는 성실함, 진달래·개나리는 분명한 거취가 그 화품이다. 그중에서도 서리 맞고도 피어나는 국화,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으뜸으로 쳤다. 지조와 절개의 화품을 지닌 꽃을 좋아한 것이다.

술과 국화를 매우 사랑했던 조선 중종 때 정승 신용개는 달빛이 국화분에 비치면 친구가 왔다하여 술상을 차리고 국화꽃과 대작하며 늦도록 술에 취했다 한다. 또한 옛 선비들이 서로 결의를 맺을 때는 서로의 황국(黃菊)과 백국(白菊)을 가져와 접을 붙였다. 이후 이 꽃의 절반은 노란 꽃을, 절반은 하얀 꽃을 피어내어, 서로의 뜻을 확인하였다. 이 꽃을 결심국(決心菊)이라 불렀다.

이 계절, 가을의 꽃은 역시 국화다. 찬 서리 맞고 피어나는 꽃, 오상고절(傲霜孤節) 국화는 서리를 업신여겨 빛을 내고, 늦으면 늦을수록 오히려 그 기품과 결기가 고고하다.

가을이 깊어 가면 갈수록 국화의 향이 더욱 진하게 퍼질 것이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의 살림살이에 꽃 타령, 국화타령이 어울리기야 하겠냐만, 이럴 때 일수록 한 움큼 거머쥔 국화 한 다발을 가족에게, 친구에게 건네보자. 어려운 시절, 버틸 수 있는 지조와 결의 그리고 향기로운 친구를 얻을 것이다.

/문화커뮤니케이터·한국외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