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는 가을에 물들었다. 핏빛보다 진한 단풍이 산을 물들이고 있다. 올해는 가뭄때문에 단풍이 별 볼일 없다고들 말하지만 변산은 아니다. 내소사 단풍은 은은하게 물들어 여행객을 맞이한다. 선운사 앞 도솔천은 '단풍극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 바람이 불때마다 낙엽비를 우수수 뿌린다.
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로 나와 30번 국도에 오른다. 첫 번째 만나는 곳은 채석강이다. 30번 국도를 따라 변산 해수욕장을 지나면 닿는다. 채석강은 그 풍경이 신비롭기 그지 없다. 검은 절벽이 바다를 앞에 두고 버티고 있다. 마치 고서적을 켜켜이 쌓아놓은 것 같다. 수억년에 걸쳐 퇴적된 수성암이다. 이름이 채석강이라 처음 가는 이들은 강으로 오해하지만 엄연히 바다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 기슭과 비슷하다고 해 이름 붙었다. 썰물이 되면 바위 위를 걸어 채석강 절벽을 한 바퀴 산책할 수 있다. 저물 무렵도 경관이 좋다. 서해의 노을이 비치는 절벽은 어느새 붉은 빛에 휩싸인다. 변산 서쪽 어느 곳이나 낙조가 아름답지만 채석강을 제일로 쳐도 좋다.
30번 국도는 해변을 휘감으며 변산반도를 일주한다. 채석강에서 내소사까지 이어지는 30번 국도의 오른편에는 가을빛을 물씬 머금은 바다가 일렁인다. 썰물때면 검은 개펄이 망망하게 펼쳐진다. 개펄 사이로 물길이 S자를 그리며 나 있고 어선이 개펄에 배를 대고 누워 있다. 가을 개펄은 기름지기만 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숟가락 떠먹어도 될 만큼 곱다.
내소사 가기 전 들를 데가 있다. 격포를 지나 가파른 해안도로를 오르면 자그마한 해변이 눈에 들어오고 곰소항 표지판이 보인다. 포구에는 낡은 목선들이 떠있고 갈매기들이 반공을 떠다닌다. 포구는 온통 젓갈 상점으로 가득 차 있다. 11월은 곰소항이 가장 붐빌 때다. 젓갈때문이다. 곰소항 젓갈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하다. 명란젓·새우젓·창란젓·멸치젓·갑오징어젓 등 없는 젓갈이 없다. 제법 크고 버젓한 건물에 들어선 젓갈 마트도 많이 생겼지만, '원조'는 포구 바로 옆의 재래시장. 여러 종류의 건어물이 수북하고, 팔팔한 생선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 곰소항을 지나 내소사에 닿는다. 633년(백제 무왕 34년) 창건된 내소사는 경내로 들어가는 전나무길이 장관이다. 입구부터 400m. 직립의 전나무가 하늘을 가릴듯 도열해 있다. 심호흡을 하면 숲 내음이 도시의 매연에 찌든 폐를 씻어준다. 길 한가운데 서서 기념사진 한 컷 찍어봄 직하다.
전나무 숲을 지나면 단풍나무 숲이다. 이번 주 무렵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내소사 단풍은 붉은 빛이 강렬하지 않지만 은은한 멋이 있다. 단풍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대웅보전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꽃무늬 문살로 유명하다. 못 하나 안 쓰고 나무토막을 끼워 맞춘 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가을볕에 반짝이는 연꽃·국화·모란 등의 꽃문양이 아름답다.
요즘 부안에서 뜨고있는 곳은 영상테마파크다. 격포항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사극 전용 촬영세트장이다. 15만㎡의 부지에 궁궐 24동, 민가 11동 등의 집들과 200m길이의 성곽, 정자와 연못, 저잣거리 등이 사실적으로 재현돼 있다. '태양인 이제마'를 비롯, '불멸의 이순신', 최초의 추리사극인 '별순검', '쾌도 홍길동' 등의 TV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화 '왕의 남자'와 드라마 '이산'도 이곳에서 찍었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내처 차를 몰아 22번 국도를 타면 선운사다. 지금 선운사는 단풍으로 뒤덮여 있다. 일주문에서 도솔천 따라 선암사까지 닿은 길이 온통 붉은색이다. 길을 걸으면 온 몸에 붉은 물이 들 것 같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당시 89개의 절집에 3천명이 넘는 승려가 수도했다는 대찰이었다. 지금도 전북지역에서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가장 크다.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 유형문화재 9점이 있다.
선운사에 도착하면 입구부터 눈이 환해진다. 입장권을 끊고 절 경내에 들어서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붉은색, 붉은색 뿐이다. 선운사를 찾은 여행객들은 초입부터 '예쁘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미당 시비를 지나 절 안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단풍숲이 짙어진다. 바람이라도 불면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붉고 노란 단풍이 쏟아진다. 도솔천도 울긋불긋하다. 물도 사람도 단풍도 함께 붉다. '삼홍(三紅)'이다. 여행객들은 절 마당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고 천천히 마당을 거닌다. 그리고 절 안에 있는 찻집에서 녹차 한 잔을 마시며 가을의 여유를 즐긴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약 2㎞의 숲길도 거대한 단풍터널을 이룬다. 길은 완만하다. 길 양옆으로는 꼬불꼬불한 활엽수들이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빼곡하고, 흙바닥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져 있다. 할아버지·할머니에서 손자 손녀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여행객들은 단풍 숲을 거닐고 사진작가들은 단풍을 찍느라 부산을 떤다. 도솔암 가는 길을 시인 정찬주는 '인간 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 가을 도솔암 가는 길을 걷다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길을 오르면 도솔암이 나온다. 여기서 시원한 물 한잔. 도솔암 오른쪽으로 내원궁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내원궁은 도솔천 한가운데 있는 궁전이다. 내원궁 건너편에 천마봉이 우뚝하게 서 있다. 바위 사이에 듬성듬성 뿌리내린 단풍나무가 운치 있다. 내원궁 서쪽의 동불암에 높이 17m의 마애불이 있다. 그 불상은 또 어찌나 평화롭게 하늘에 떠있는지!
도솔암에서 내려온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붉고 노란 단풍과 마주친다. 내려오는 길이 더디고 또 더디다. 단풍에 취해 선운사 앞마당을 또 얼마나 서성여야할지 모를 일이다.
■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 부안IC로 나와 30번 국도를 탄다. 30번 국도는 변산반도를 일주한다. 변산해수욕장·채석강·곰소항·내소사를 차례로 지난다. 곰소항에서 23번 국도와 22번 국도를 이용하면 선운사다.
■ 잠잘 곳=격포항 주변에 모텔이 많다. 곰소항 입구의 곰소황토한증막(063-581-6974)은 숙박을 겸한다. 모항비치텔(063-583-5545)은 변산반도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으로 꼽힌다. 모항해수욕장 옆에 있다. 곰소모텔(063-584-8852)은 곰소항에서 비교적 시설이 깨끗한 곳. 첼로모텔(063-584-1584)은 펜션형 모텔이다. 선운사 입구에 동백호텔(063-562-1560)과 관광호텔(063-561-3377)·선운장여관(063-561-2035)·유스호스텔(063-561-3333) 등 숙박시설이 밀집해 있다. 고창읍 석정리 석정온천(063-564-4441)은 게르마늄 성분을 함유한 온천, 구시포 해수찜(063-561-3323)은 찜질방과 한증막 등을 갖춰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 먹을 곳=선운사 입구에 풍천장어집이 즐비하다. 바다와 민물이 합쳐지는 풍천에서 잡힌 장어를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양념을 한뒤 숯불에 구워낸다. 연기식당(063-562-1537)과 신덕식당(063-562-1533)이 가장 유명하다. 고창읍내 조양관(063-508-8381)은 문을 연지 60년이 넘는 한정식집이다. 채석강 옆 격포항 주변에는 횟집촌이 형성돼 있다. 이어도횟집(063-582-4444)이 유명하다. 곰소항부근의 곰소쉼터(063-584-8007)는 젓갈정식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집이다.
글·사진/최갑수 여행작가 ssucho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