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지난 겨울과 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대운하 바람을 쫓아 어떤 이는 적은 돈이나마 불려보려는 작은 욕심을 가지고, 어떤 이는 투자라는 허울을 쓴 투기꾼의 심보를 가지고 대운하 수혜지들을 찾아다녔다. 여주군 점동면의 어느 마을에도 그런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은 세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대운하의 핵심물류기지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알려졌던 삼합리다. 삼합리는 대운하 논란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있는 요즘에도 그 이름이 언론에 종종 오르내린다. 발 빠르게 한몫 챙긴 투기꾼을 제외하면, 많은 투자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기사 속에서 말이다.
# 세물머리, 고요한 마을에 불던 광풍이 물러가고
삼합리로 가는 길에 부동산 업자의 방치된 컨테이너들과 찢겨진 채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이 심심찮게 눈에 띄리라 짐작했지만, 웬일인지 그런 광경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삼합리에 도착하기 전에는 이런 걱정도 했었다. 개발에 대한 기대가 꺾이면서 주민들의 삶에 상처가 깊게 패이고 인심도 야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삼합1리와 2리의 갈림길에서 2리 방향으로 접어드니 여느 농촌마을, 아니 다른 농촌마을보다 더 고즈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산이 마을을 감싸 안고, 앞으로는 강이 흐리고, 그 물줄기와 마을 사이에 자리한 꽤 넓은 들판에는 미처 수확하지 않은 노란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강변으로 향하는 마을 안길에는 크고 작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정자목이 중간 중간 서 있었다. 가을 햇볕도 따뜻했다. 이런 모든 풍경이 평안함을 느끼게 했다. 하루 여덟 번씩 들고나는 여주행 마을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던 한 촌로를 만났다.
그는 "이곳은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살던 피난고지"라고 자랑했는데, 큰 산 속이 아님에도 그 자랑이 쉬 수긍할 만하게 느껴진 곳이 삼합리였다. 그래서일까. 삼합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몇 달 전 개발의 광풍을 뒤로 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개발에 대한 기대야 다 접을 수 없고, 오른 세금에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지만, 내 땅, 내 고장을 온전히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이도 적지 않은 듯했다.
# 담배 한 개비 피울 시간에 삼 도(道)를 넘나드는 곳
삼합리는 세물머리다. 원주 쪽에서 흘러내린 섬강과 충주에서 내려온 남한강, 그리고 용인에서 장호원으로 흐른 뒤 충북 음성을 지나서 삼합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청미천이 만난다. 그래서 이곳 토박이면 누구나 강가에 나가 양동이 가득 물고기를 잡았던 기억을 갖고 있는데, 대오마을 앞 섬강과 남한강의 합수머리에서는 살치 떼로 인해 강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까이 큰 물줄기가 있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기억에서 가장 큰 홍수는 상류, 중류, 하류를 가릴 것 없이 한강변을 초토화시킬 만큼 큰 피해를 입혔던 1972년 홍수였다. 아랫말에 거주하는 김영복 옹도 당시 자신의 집이 처마까지 잠겼을 정도라며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하였다. 그해 홍수로 인해 어엿한 마을의 규모를 지녔던 대우마을도 큰 피해를 입어 주민의 상당수가 마을을 떠나서 몇 가구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삼합리는 세물머리이자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등 3개 도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세 물줄기가 만나고 삼도가 만나다 보니 삼합리란 이름이 붙음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김영복 옹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곳의 특징을 잘 표현한 듯하다. "여기가 삼 개 도(道) 접경이요. 저 강 너머는 거기가 강원도구, 산 요쪽에는 충청도구, 여긴 경기도구. 그래 담배 하나 피워 물구선 삼 개 도를 순식간에 간다 그래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삼도를 넘나들 수 있다니 이곳 주민만이 만끽하였을 즐거움이 아닐까.
# 대오마을에서 만난 합수머리의 아름다움
삼합리에서 삼도가 만나는 지점은 창남나루 앞 남한강에 있다. 창남이라는 이름은 강 건너 원주시 부론면에 있던 흥원창 남쪽에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 나루에는 1990년대에도 부론면으로 오가는 이들의 발길이 잦았다. 차를 타고 갈 때보다 시간과 비용이 절약되니 나룻배를 이용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도로 사정이 좋아지고 차량이 늘어나면서 나루는 10여 년 전에 폐쇄되었다.
아랫말에서 창남나루가 있는 창내미와 대우마을로 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중간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며 2㎞ 정도를 가서야 나루가 있는 창내미에 닿았고, 그곳에서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대우마을 앞 합수머리로 향했다. 합수머리로 가는 길가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김장철 출하를 앞둔 무가 밭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대우마을은 논농사보다 밭농사의 비율이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 주로 재배하는 작물은 고구마, 무와 배추 등인데, 과거엔 여주군의 특산물인 땅콩도 많이 재배했다고 한다.
밭들이 온통 초록빛이었던데 비해서 강변은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강변 가득한 갈대숲이 강 건너 강천리 쪽의 자산(紫山) 뚝바위와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었다. 전설에 의하면, 자산의 그림자가 잠긴 물속을 보면 붉은 천도복숭아가 가득히 비친다고 한다. 그림자로만 비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복숭아를 따서 먹기만 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욕심을 내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자산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다.
# 창남나루에서 만난 또 하나의 아름다움
합수머리를 뒤로 하고 나루의 흔적이나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창내미 쪽 강가로 내려가다 한 주민을 만났다. 옛 뱃사공을 만났으면 하고 바랐는데, 때마침 만난 주민이 나루가 폐쇄되기 전까지 나룻배의 사공이었던 최대현씨였다. 그는 현재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어업을 겸하며 살아가고 있다. 점동면에서 어업면허를 가진 이가 그 뿐이라고 하니 점동면 유일의 어부인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와 오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농사로 인해 바쁘다며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떠나는 그를 보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나루가 있었다던 강가로 내려가 보았다. 작은 동력선 한 척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어선인 대오호였다. 지난봄에 들렀던 이포나루의 모습과 닮은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삼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가 절벽에서 남한강으로 삐죽 튀어나온 바위 하나가 역광 속에서 눈에 띄었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듯이 보이는 바위, 그리고 그 바위 주변에서 노니는 오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진 것은 단지 역광 때문이었을까. 대우마을 앞 합수머리에 우뚝 솟은 뚝바위처럼 장엄하지는 않아도 그 나름대로의 멋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삼합리의 숨겨진 아름다움 하나를 찾아 낸듯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