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국내 민항 항공기가 도입된 지 60년 만에 첫 여성 기장으로 탄생한 신수진(40), 홍수인(36)씨가 화제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항공기 기장의 자격 요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또한 보이지 않는 남·여 차별의 벽마저 넘어서며 국내 민항 항공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


보이지 않는 '금녀(禁女)의 벽'은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수백년간 존재했다. 특히 지휘자의 포디엄(Podium)은 수백년간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뉴욕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1915~2003)는 저서 '위대한 지휘자들'(1967)에서 "여성 지휘자가 무대에 서면 언제 업비트(지휘봉을 위로 들어올리는 동작)가 시작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그때 속치마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숀버그의 우스갯소리는 지휘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당시의 통념을 반영한다.

최근 세계를 향해 거침 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33)씨가 올해 초 서울시립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국내 음악팬들과 조우했다. 당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등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인 성씨는 섬세한 연주와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로 진한 인상을 남겼다. 아울러 국내 음악계에 만연된 여성 지휘자에 대한 보이지 않은 편견 또한 타파하는 역할까지도 했다. 현재 성씨는 제임스 레바인이 음악감독으로 있는 보스턴 심포니의 부지휘자로 활동중이다.

음악 사상 첫 여성 지휘자는 1860년대 오스트리아 빈에서 '루트비히 모렐리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마리 구르너이다. 그녀의 임명은 당시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여성 해방 폴카'를 작곡할 정도로 화제였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여성 지휘자들은 여성 단원으로만 구성된 '여성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들어 여성 지휘자들의 행보는 눈에 띄게 확장되고 있다. 여성 지휘자들의 활약은 급기야 한 보수적인 악단의 '금녀의 벽' 마저 허물어버렸다.

1842년에 창단한 빈 필하모닉은 2005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지휘자 시몬 영(48)의 손끝을 보며 연주회를 가졌다. 창단 후 처음 여성 지휘자를 포디엄에 세운 빈 필하모닉은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는 악단의 특성상 엄청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이날 영은 말러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중 발췌, 슈만의 '교향곡 4번' 등을 연주했다. 현재 함부르크 국립오페라단의 음악총감독 겸 함부르크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영은 성시연씨가 자신의 역할 모델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여성 지휘자이다.

영은 1985년 고향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데뷔했다. 87년 '올해의 젊은 호주인'으로 선발돼 장학금을 받고 런던 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 후 영은 제임스 콘론(쾰른 오페라), 다니엘 바렌보임(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부지휘자로 활동했으며, 노르웨이 베르겐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를 지냈다.

한편 베를린 필하모닉이 1930년, 뉴욕 필하모닉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는 각각 1938년도에 여성에게 포디엄을 개방했다. 처음으로 여성 단원을 받아들인 오케스트라는 1913년 영국 퀸즈홀 오케스트라다. 이어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1930년, 보스턴 심포니는 1941년, 뉴욕필은 1966년에 차례로 금녀의 벽을 허물었다. 빈 필하모닉의 첫 여성 단원은 1997년 입단하는데, 여성 단체의 반발과 오스트리아 의회의 압력에 의해 안나 렐케스가 하프 단원으로 활동했다.

여성 단원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돋보이는 몇몇을 제외하고 여성 지휘자의 활약은 아직도 미미하다. 미국 출신의 여성 지휘자 머린 앨솝(49)이 볼티모어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된 것은 2005년이다. 앨솝은 미국의 메이저 교향악단 사상 첫 여성 음악감독이다.

정명훈 서울시향 음악감독은 "과거 40년 전만해도 여성 바이올린 주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며 "현재 많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지휘계에도 앞으로 섬세한 여성 지휘자들이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