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독립만세운동의 열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1919년 3월 29일 수원 화성행궁 자혜병원 앞.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기생조합의 기생 30명은 이곳에서 갑자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성병검사'를 받기위해 이곳 자혜병원에 들른 길이었다.
기생들이 독립운동이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하지만 이들에겐 만세를 부른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궁중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 기생들은 식민지로 재편되기 전까지는 관청에 소속된 관기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공창제도를 확장했고, '예술가'로 평가받아왔던 기생들은 졸지에 한낱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됐다. 더 나아가 정기적인 성병검사까지 받게 되니 기생들이 '모욕적인 처사'라고 생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관기였던 기생들의 입장에서 볼때, 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물렀던 '화성행궁'은 기생들의 고향집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화성행궁의 가장 중요한 정궁 역할을 하는 봉수당을 허물어 자혜의원을 설치했고, 화성행궁 낙남헌 건물은 식민통치기구인 수원군청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화성행궁의 친위군인 장용외영 소속 군사들의 군영(군대가 주둔하는 곳)은 경찰서로 변했다. 이곳이 자신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현실이 수원기생들에게는 더욱 치욕적이었을 것이다.
치욕은 두려움을 이겨냈다. 자혜병원 앞에는 자신들을 통제하고 단속하던 일제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그렇기에 상황은 더욱 위협적이었지만, 김향화 등 수원기생들은 기어이 '만세'를 불렀다. 경찰은 시위의 선두에 섰던 당시 23세의 김씨를 주동자로 체포해 두 달여 동안 모진 고문을 한후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매일신보는 1919년 6월 20일자에서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김향화에 징역 6월이 언도되었는데 수원 독립만세운동에 관련된 혐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책은 권번과 기생조합의 기생들을 홍보하기 위해 발간된 자료로 일제가 기생들을 통제하고 있는 식민지배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는 기생을 권번과 조합으로 편성해 식민지배의 통제 아래에 두었기 때문이다. 천한 기생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동근 위원의 설명이다. 권번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고, 기생조합은 요릿집과의 계약을 통해 기생의 '놀음'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상업적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일제가 만들어낸 권번과 기생조합은 결국 기생들의 상품화와 기예의 대중화를 낳았다.
이 위원은 "조선미인보감은 원래 개인 소장본이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민속원측이 원본을 사진으로 복사하여 인쇄하면서 1910년대 수원기생조합의 존재가 드러나게 됐다"며 "그동안 김향화의 나이만 알았었는데, 이 책에는 김향화의 얼굴 뿐 아니라 원적·주소가 다 나와, 독립운동과 지역사적 연구 차원에서 아주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은 또 "수원의 기생들은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고)가 재정적 위기에 처하자 자선공연을 벌여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할 정도로 의식화된 이들이었다"며 "수원기생조합이 있던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건너편에 김세환(기독교측 대표로 민족대표 48인중 한 명)이 교사로 있던 수원 삼일여학교(현재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가 있었다. 아마도 김세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위원은 이들을 민족운동의 일원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행히 김향화는 빠르면 내년 순국선열의 날인 11월 17일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을 예정이다. 이동근 위원이 최근 김향화를 '수원시'의 이름으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김향화의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서 '수원시'로 대리신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현재 국가보훈처는 김향화의 후손 찾기에 들어갔으며, 그 과정에서 김향화의 수형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껏 6개월 언도만 받았을 뿐 수형을 치렀다는 기록은
이 위원은 "이제껏 기생들은 대중적 취향에 맞춰 대중 예술인으로만 조명받았었는데, 민족 감정을 가지고 일제와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한 계층이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며 "앞으로 아시아 역사자료센터와 역사정보통합시스템이 DB화되면 기생들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