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오후 9시께 태국 반정부 단체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태국의 관문인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 모든 항공기 이착륙이 중지됐다. PAD는 이어 27일 방콕 외곽의 돈므엉 공항까지 점거했고, 태국 정부는 폐쇄된 두 공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휴양지로 개발된 태국은 푸껫(Phuket)과 파타야(Pattaya), 치앙마이(Chiang Mai) 등 동남아에서 이름난 관광지들을 가졌다. 즐길거리가 풍부하고, 5시간 정도의 멀지 않은 비행거리와 저렴한 물가 등으로 국내 단체여행객들이 유독 몰리는 나라다.
최근에는 유럽인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코사무이(Ko Samui)까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수완나품과 돈므엉 공항이 폐쇄됐을 당시 태국에는 우리 관광객 수천명을 포함해 많게는 수십만명의 외국관광객들이 머물고 있었다.
# 탈출구는 우타파오
지난 2006년 세워진 태국 최대 공항 수완나품이 폐쇄되고, 방콕 인근의 돈므엉 공항까지 가동이 중지되자 태국 정부와 관광업계는 다른 탈출구를 찾았다.
국제선 항공기가 취항하는 공항은 치앙마이와 푸껫, 그리고 파타야 인근의 우타파오(U-TAPHAO) 공항 정도.
외국인 관광객 대다수가 수완나품 공항을 이용하기 위해 이미 방콕 주변에 몰려있었고, 치앙마이와 푸껫까지의 거리가 방콕에서 차량으로 10시간 정도인 점을 감안했을 때 최적의 대안은 역시 우타파오였다. 군이 운영하기 때문에 시위대가 점거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것도 우타파오의 장점이었다.
태국 정부도 우타파오를 국제선 대체공항으로 지정, 태국 '엑소더스(Exodos:대탈출)'에 동참하려는 외국관광객들의 우타파오 공항으로의 대이동이 시작됐다.
우타파오 공항은 태국 해군의 군용비행장으로 방콕에서 남쪽으로 약 140㎞, 파타야에서는 북쪽으로 약 50㎞ 떨어져 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건설된 우타파오 공항에 여행가방용 X-레이 검색기는 한 대 뿐이고, 입국자들이 짐을 찾는 컨베이어벨트도 달랑 한개다. 입출국 관광객들이 뒤섞이며 극심한 혼잡이 빚어졌고, 한국 관광객 중에서도 하루에 서너명씩 짐을 분실하는 낭패를 겪었다. 발권창구도 고작 4곳이라 한 창구에서 많게는 5편의 국제선 항공권을 발권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아시아나 항공을 비롯한 몇몇 항공사들은 아예 여객터미널 밖에 임시 창구를 만들어 발권을 하기도 했다.
공항 폐쇄 전 수완나품 공항에서 하루에 이착륙한 항공기는 700대를 상회했다. 하지만 우타파오 공항은 40대고작이다.
이런 우타파오 공항에 전 세계 30여개국의 국적기들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당연히 이착륙이 지연됐고, 자칫 항공기끼리 충돌하면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스치기만 하더라도 항공사는 막대한 돈을 날리게 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됐다.
태국 국내선 100여석 짜리 소규모 항공기 한 대가 착륙하는 데도 예정시간보다 무려 2시간 이상이 지체되는 등 이착륙 스케줄은 완전히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 혼란의 도가니
지난 1일 오후 4시 우타파오 공항 정문. 여객터미널까지 이어지는 왕복 2차로 도로 양쪽은 빽빽하게 주차된 차량으로 가득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가방을 짊어지거나 끌며 여객터미널쪽으로 부지런히 이동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빨아들인 여객터미널 일대는 난장판이었다.
이착륙 지연으로 대부분의 항공기가 밤에 떠나지만 이미 출국장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줄서기를 포기한 관광객들은 출국장을 둘러싸고 앉아 호시탐탐 줄 속으로 뛰어들 틈을 노리고 있었다. 터미널 주변에는 부서진 여행가방과 옷가지, 음식물찌꺼기 등 온갖 쓰레기와 아무데나 어지럽게 쓰러져있는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우타파오 공항으로 외국관광객이 모여들던 초기에는 경찰이 통제했지만 관광객들이 미어터지며 질서가 무너지자 지난달 30일부터는 군인이 나와서 공항 일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막무가내 관광객들은 존재했다. 특히 단체관광객들의 여권 수십개를 들고 줄 속으로 새치기를 해 발권을 하는 여행사 직원들이나 몰래 출국장이 아닌 입국장으로 들어간 뒤 터미널 안에서 다시 출국장으로 넘어가는 얌체 한국인들의 행태가 두드러졌다. 몇몇 한국인들이 이 같은 방법으로 먼저 출국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자 너도나도 짐은 밖에 둔 채 몸만 먼저 터미널 안으로 집어넣고 보는 추태가 대규모로 벌어지기도 했다. X-레이 검색기를 통과한 뒤 짐을 부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아예 짐은 나중에 보내달라고 관광가이드에게 맡긴 뒤 귀중품만 몸에 두르고 일단 발권 대열에 합류하는 신혼부부들까지 있었다.
아무리 줄을 서도 항공권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일명 '항공작업'으로 좌석을 사전에 찜하기 위해 대거 국내 여행사로 국제전화를 날리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항공기 예약번호인 PNR(Passenger name record)을 받아놓고 대기하면 탑승확률이 한결 높아진다는 계산 때문이다.
태국 현지 가이드 박모씨는 "가이드 생활 10년이 넘었지만 대형 여행사들이 항공사를 통해 PNR을 무더기로 넘겨받아 현장 대기순번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라며 "처음에는 대기순번대로 태운다고 했지만 PNR이 남발돼 정작 꼭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발목을 잡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 엇갈리는 희비, 그 속의 짧은 여유
수완나품 공항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약 1주일. 이 기간 동안 최대 수만명의 외국관광객들이 우타파오에서 귀국을 위한 홍역을 치렀다.
'귀국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11월 마지막 주말을 전후한 사나흘. 수많은 관광객들이 항공권을 못구해 며칠씩 노숙을 하며 극도의 혼란을 경험했다. 일부는 운이 좋아 임시 발권창구가 만들어진 순간 바로 줄을 서 쉽게 우타파오를 떠나기도 했고, 또 누구는 똑같은 항공권을 갖고도 줄을 잘못서 가슴을 치며 먼저 귀국한 일행이 한국에서 걸어온 국제전화를 받기도 했다.
피부색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귀국이란 똑같은 목적 달성을 위해 같은 장소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호흡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국제적으로도 드문 혼란이 며칠씩 계속됐던 우타파오 공항.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찾는 모습은 곳곳에서 포착됐다.
지난달 30일 오전 2시 X-레이 검색기가 고장나 수천명의 사람들이 서너시간 동안 오도가도 못한 채 출국장 문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때 갑자기 노래 한소절이 울려퍼졌다. 대열을 통제하던 현지 경찰이 확성기로 노래를 불렀고, 음정 박자도 틀린 그의 노래에 관광객들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어 독일 여성에게 넘어간 확성기에서는 "소나무야, 소나무야(O Tannenbaum, O Tannenbaum)∼"로 시작하는 익숙한 독일민요가 흘러나왔다.
항공기 탑승을 기다리던 대기실에서는 한 무리 외국인들이 부르는 "해피버스데이 투 유∼"가 메아리쳤다. 먼 이국 땅에서 생일을 맞은 이름 모를 그 외국인을 위해 사람들은 생일과 무사 귀국을 기원하는 노래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자원봉사자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태국 자원봉사자들은 생수와 샌드위치를 무료로 나눠줬고, 현지 적십자사는 무료 건강체크와 함께 커피와 차 등을 무상 공급했다. 파타야 한인회도 천막을 치고 식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김밥을 공짜로 제공했다.
파타야의 한우리식당 사장은 "어려움을 겪는 동포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아침부터 김밥을 싸서 왔다"고 말했다.
"불안한 정국 무서워요" 입국발길 끊겨 가이드등 관광산업 종사자 "생계막막"
"이제 태국 가이드 생활을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태국은 관광의 천국이다. 1년 내내 태양이 내리쬐는 열대기후와 에메랄드빛 바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와 독특한 전통문화는 태국을 세계적인 관광대국으로 만들었다. 연간 태국을 방문하는 외국관광객들은 1천2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관광산업이 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를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관광객들도 매년 10만명 이상 태국을 찾고, 그 숫자는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관광객들이 넘치자 한국인 관광가이드도 방콕에만 2천여명을 비롯해 푸껫과 치앙마이, 파타야 등 태국 전역에서 수천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관광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태국 정부나 대다수 국민에게 관광산업에 대한 위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9월 시위대의 점거로 푸껫 공항이 폐쇄된 전례가 있어도 '설마 외국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수완나품 공항은 괜찮겠지'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수완나품 공항 폐쇄는 관광업계 종사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번 사태로 외국관광객들이 태국의 정치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확인됐다. 여기에 앞으로도 불안정할 것으로 진단되는 태국의 정치현실은 관광산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3시 태국 동부해안 최고의 휴양지인 파타야의 좀티엔(Jomtien) 해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휴양지로 개발된 파타야는 태국을 찾는 관광객 중 3분의 1이 다녀가는 명소이고, 좀티엔 해변은 그런 파타야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이다.
약 6㎞에 이르는 좀티엔 해변을 따라 걷자 줄지어 늘어선 호텔과 식당, 술집, 편의점, 기타 상업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래사장을 가득 메운 푸른색 파라솔들은 야자나무와 어우러져 휴양지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이용하는데 우리돈으로 1천원이면 충분해 항상 관광객들이 바글거리던 파라솔은 텅텅 비어 있었다. 빈 파라솔 사이사이로 가끔씩 음식을 파는 행상들만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수상스키와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등 수상레저기구들도 바다 위에서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평소 같으면 외국인들로 가득할 해변 거리도 인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한산했다. 트럭을 개조해 만든 서민 교통수단 쏭태우들만 열대의 태양 아래 늘어서 있었다.
시내쪽에 몰려있는 한국식당들도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은 아예 문을 닫아걸어버렸다.
택시기사 벤자삭(Benjasak)씨는 "공항 폐쇄 뒤 들어오는 관광객이 없기 때문에 파타야에도 사람이 없다"며 "앞으로도 이럴 것 같아서 큰 걱정이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28일 코사무이의 차웽(Chaweng). 1970년대부터 유럽인을 위한 휴양지로 개발된 코사무이의 중심가다. 유럽인들의 휴가가 시작되는 11월말부터 연말까지는 코사무이의 최고 성수기로 빈 방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번성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신혼여행지로 점점 알려지고 있어 한 주에 많게는 수백쌍씩 이곳에서 신혼을 즐기고 있다.
수완나품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차웽해변을 따라 조성된 거리에는 고급 풀(Pool)빌라와 리조트, 식당, 상점 등이 줄줄이 늘어서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하지만 공항 점거 사태가 터진 뒤 상황이 180도 변했다. 빠져나가는 관광객만 있고 들어오는 관광객은 없어 거리에서는 활기가 사라졌다. 이날도 빈 택시들만 차웽거리를 메웠고, 상점 주인들이 삐죽 내민 고개들만 거리 양쪽에 즐비했다.
현지 여행사 가이드 김모(32·여)씨는 "이번주에 예정된 신혼여행은 물론 다음달 여행일정까지 줄줄이 취소됐다"면서 "회사 차원에서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다른 직업을 구하든가 한국으로 돌아가든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국 우타파오·파타야·코사무이/김창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