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다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보았다. '위험하오니 안전 휀스에 기대지 마세요'. 승강장과 철길 사이에 세운 쇠기둥 울타리를 '안전 휀스'라고 적은 것이다. 외국어 표기 원칙에 따르면 '휀스'가 아니라 '펜스'라고 적어야겠지만, 어찌 보면 그게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그걸 굳이 영어 단어를 빌려 적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비슷한 예는 '스크린 도어'라는 말이다. 지하철 어디에 많이 써 붙여 놓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항상 지하철을 탈 때 나오는 안내 방송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스크린 도어'라는 말을 듣는다. 단지 글자를 한글로 적는 문제가 아니라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외국어 단어를 이용해 사물의 이름이나 생활 용어를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안전문, 안전 덧문'이라고 하면 더 의미가 분명할 텐데 '스크린 도어'를 고집하고, '손잡이'라고 하면 될 걸 '핸드 레일'이라고 쓰며 그 뒤의 괄호 속에 '손잡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은 당연히 '스쿨 존'이다.

▲ 이 건 범 (주)위즈덤하우스 기획위원
지금 든 예들은 모두 우리 생활의 안전과 관계된 말들이다. 우리말과 한글을 아끼고 가꾸는 문제 이전에 국민의 생명과 곧바로 이어진 영역이다. 그리고 개인의 언어 습관 이전에 공공 영역에서 굳어진 표현 관행의 문제다. 특히 안전에 관계된 영역은 무엇보다도 국민 대다수가 알아들을 수 있는, 즉 분명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용어의 사용이 사고 발생을 방지하는 첫걸음이다. 국어기본법에서 규정하는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넘어서서 '한국어'(말과 글 모두) 사용을 의무화해야 하는 첫째 영역은 바로 안전과 건강 분야다.

중국 식품의 멜라민 파동이 나기 직전에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식품의 표시 기준에 관한 규정을 고치려 했다. 외국어 표기가 전체 면적의 절반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없애려 한 것이다. 식품의 표시 기준 대상은 단지 상품명만이 아니라 원산지나 성분, 원재료 등을 포함한다. 이 규정을 고쳐 시행하기 직전에 바로 멜라민 사태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우리 한글문화연대는 멜라민 사태 이전부터 개정의 부당함을 지적하였지만, 식약청이 개정을 포기한 건 우리 주장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다른 여러 가지 삶의 가치 이전에 안전과 건강은 행복의 최우선 조건이다. 정부와 공공 영역에서 특히 건강과 안전에 관한 용어 사용은 철저히 국민 대다수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과 한글 사용 원칙을 제도화해야 한다. 안전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세이프티 퍼스트'라는 구호를 붙여 놓은 어느 지하철 역에서 차를 기다리며 이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