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

       -송재학

풀잎 앞에 쓰러져
울어 준 것들만의 힘으로
풀잎이 초록은 아니다
풀잎이 가진 초록이란
일생을 달리고도
벗어날 수 없는 오랑캐 들판
그 넓이만큼
죽음이나 여름을 만난다.

풀잎은 지는 해를 위해
수평선의 고요를 아꼈던 것
초록이 운명에 휩쓸릴 때
초록은 그곳까지 한달음에
도착하기도 한다.
풀잎 속이라면
초록은 일제히 일어나야 할
때를 알고 있다.

시인은 '풀잎은 지는 해를 위해/수평선의 고요를 아꼈던 것'이라고 했다. 하! 이건 놀랍지 않은가. 풀잎이 지는 해를 위하다니! 수평선의 고요를 아끼다니!

시인은 또 이렇게도 노래했다. '풀잎 속이라면/초록은 일제히 일어나야 할/때를 알고 있다'고. 어허! 이건 또 얼마나 거룩한가?

풀잎과 초록이 이토록 위엄이 넘치고 거룩한 적 있었던가? 풀잎에 대하여, 초록에 대하여 우리는 고작 작고 사랑스러운 것 정도로만, 생기 넘치는 어떤 것으로만 알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시에서 우리는 존엄적 가치를 획득한 풀잎과 초록을 만나게 된다.

인간인 우리는, 풀잎도 초록도 개미도 메뚜기도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존엄하다고 뻐겨왔지만,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감히 존엄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물어보라, 풀잎에게 물어보라, 초록에게 물어보라. 그들에게 우리 과연 존엄하냐고, 겸손하게 물어보라.

-박병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