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삭금마을의 일몰.

매생이를 처음 맛본 것은 불과 5년전 장흥을 취재차 찾았을 때다. 길라잡이를 맡은 어느 시인이 한 식당으로 팔을 이끌었는데 처음 보는 국이 나왔다. 하얀 국그릇에는 파래처럼 생긴 것이 담겨 있었다. 매생이국이라고 했다. 흐물흐물해서 숟가락으로 잘 떠지지도 않았다. 차라리 훌훌 마시는 편이 나았다. 그 뒤로 매생이국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맛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밍밍한 맛 정도라고 할까? 그러다가 3년전 겨울, 정일근 시인이 쓴 '매생이'라는 시를 읽고 매생이국 맛이 불현듯 궁금해졌다.

'매생이처럼 달고 향기로운 여자와 살고 싶다./ 아침 저녁 밥상에 오르는 매생이국을 먹으며/ 눈 나리는 겨울밤 뜨끈뜨끈하게 보내고 싶다./ 매생이를 먹고 자란 나의 아내는/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여자일거니, 우리는/ 명주실이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것이다.'

그뒤 겨울 장흥을 취재할 때마다 매생이를 맛보았고 어느덧 겨울이면 매생이국이 절로 생각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뜨끈한 매생이국을 한 술 떠서 입 안으로 넣는 순간 가득 퍼지는 향긋한 갯내음이란! 천길 바닷속의 깊고 깊은 맛이 밀려드는 느낌이다.

안도현 시인이 '사람'이라는 산문집에서 매생이를 두고 말했던 "남도의 싱그러운 내음이, 그 바닷가의 바람이, 그 물결 소리가 거기에 다 담겨 있었던" 바로 그 맛이다.

매생이는 장흥·완도·고흥·강진·해남 등 남해안의 맑은 바닷가에서 난다. 12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채취할 수 있는데 파래보다 올이 훨씬 가늘다.

'자산어보'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매산태', '매산' 등으로 적혀 있다. 나이 든 사람은 지금도 '매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매생이는 십 수년 전까지 '잡초'였다. 김을 양식하던 주민들은 매생이를 '웬수'로 여겼다. 김발에 매생이가 올라붙는데 매생이가 섞인 김은 절반 값도 못받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매생이가 김과 자리를 바꿨다. 옛날엔 돼지고기와 함께 끓여 먹었는데 요즘은 주로 굴을 넣어 끓인다. 끓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매생이를 민물에 헹군 다음 한 컵 정도의 물을 붓고 굴과 다진 마늘 등을 넣고 끓인다. 소금이나 조선간장으로 간을 하면 된다.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으로도 좋다. 술이 덜 깬 아침, 매생이국을 한 그릇 후루룩 들이켜면 어지간한 숙취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

매생이국 한 그릇으로 속을 뜨끈하게 데웠다면 장흥 여행에 나서 보자. 장흥은 예로부터 문림의향(文林義鄕)으로 불리는 곳. 소설가 이청준과 송기숙·한승원·이승우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진목리에는 이청준이 태어난 생가가 있고 차로 10여분 거리인 신상리에는 한승원 생가가 있다.

이청준은 진목리에서 중학교 시절까지를 보냈다. 진목리에 들어서면 마치 70년대로 돌아온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을 입구에는 널찍한 공터가 자리잡고 있고 공터 한 쪽에는 마을 창고가 있다. 공터에서 마을길을 따라 100m쯤 가면 이청준 생가가 나온다. 하지만 그 모습은 다소 실망스럽다. 장흥군청에서 복원했는데 얼기설기 엮은 나무 벽에 플라스틱 기와를 대충 얹어놓았다. 마루에 '방명록'이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다. 진목리로 들어서기 전 영화 '천년학' 세트를 볼 수 있다.

진목에서 회진 방면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10여분을 가면 신상리다. 한승원 생가가 있다지만 제대로 된 안내판조차 없을 뿐더러 그 흔적 역시 찾기 어렵다. 신상리 포구에는 한승원 문학비가 있지만 태풍에 넘어져 바닷가에 떨어져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의 모습은 평화롭고 한적하기만 하다.

▲ 천관산 문학공원의 돌탑들. 장흥 주민들이 쌓아올린 것이다.

천관산 문학공원은 이청준·한승원·차범석 등 국내 유명 문인 54명의 육필원고가 새겨진 문학비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 문학공원 오르는 길 양편에 삐죽삐죽 솟은 600여개의 돌탑이 장관이다. 대덕읍 주민들이 쌓아올렸다. 돌탑을 지나 문학공원에 들어서면 자연석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다. 문학공원은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기에 알맞은 넓이다.

남포마을은 임권택 감독이 영화 '축제'를 촬영한 곳. 마을 앞에 '소등섬'이 떠 있다. 영화 촬영 이후 남포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하나 둘 늘어났고 굴 구이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꽤 알려진 관광지가 되었다. 마을 앞 300m 정도 되는 해변을 굴 껍질이 가득 메우고 있다.

강진 가까운 삭금마을은 일몰 명소다. 사진작가들만 알음알음 찾는다. 포구에 정박한 작은 어선들 너머로 시뻘겋게 떨어지는 일몰이 장관이다. 행운이었는지 삭금에 다다를 즈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금빛으로 찬란히 물들어 가는 바다. 어선 한 척이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승원이 그의 소설 '불의 딸'에서 묘사한 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그 바다는 은빛으로 번쩍거렸고, 금빛칠을 해놓은 것 같았고, 허연 눈이 덮여 있는 것 같았고, 회칠을 해놓은 것 같았고, 흰 옥양목천을 깔아놓은 것 같았고, 쪽빛물을 들여놓은 것 같았다."

보림사도 가볼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선종이 제일 먼저 들어온 절이다. 가지산 자락에 울려퍼지는 범종 소리가 아름답다. 대웅보전 뒤편에서 동부도로 이어지는 숲길도 예쁘다. 김영남 시인은 보림사의 범종 소리를 듣고 '참빗'이라는 시를 썼다.

"먼 보림사 범종 소리 속에/ 가지산 계곡 예쁜 솔새가 살고 있고,/ 그 계곡 대숲의 적막함이 있다./ 저녁 햇살도 비스듬하게 세운./ 난 이 범종 소리를 만날 때마다/ 이곳에서 참빗을 꺼내/ 엉클어진 내 생각을 빗곤 한다."

매생이가 자라는 맑은 바다가 있고 문학의 짙은 향이 서린 곳 장흥. 이 겨울이 다가기 전 한 번쯤은 가볼 만하지 않을까?

▲ 굴을 넣고 끓인 매생이국.


■ 교통: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포에서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간다. 호남고속도로 타고 가다 광주 광산 IC로 나가 나주·영암·강진을 거쳐 장흥으로 가도 된다.

강진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장흥읍 방면으로 가다보면 진목마을을 지난다. 이청준 생가, 한승원 생가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천관산 문학공원 역시 강진에서 장흥가는 23번 국도변에 있다.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수문항은 장흥 동쪽 끝에 있다. 장흥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옥서워터파크' 방면으로 간다.

■ 숙소: 장흥읍내 장흥관광호텔(061-864-7777)을 비롯해 귀빈모텔(061-863-2083), 그랜드모텔(061-863-0042) 등 모텔이 여럿 있다.

■ 먹거리: 장흥읍내의 들뫼바다(061-864-5335), 회진면의 천년학횟집식당(061-867-5555) 등에서 매생이를 맛볼 수 있다.

삭금마을 바닷가에 있는 삭금횟집(061-867-5461)의 된장물회도 맛있다. 자연산 깔딱(농어새끼), 돔과 열무김치·고추 등을 넣고 된장에 버무린 후 물을 붓고 내놓는다.

글·사진/최갑수 여행작가 ssucho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