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동도향교 안향이 세운 우리나라 유교의 발상지.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 유학자 안향( 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와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조선 영조 17년(1741년)에 부사 조호신이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교동연륙교가 조기에 완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화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월선포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현수막 문구다. 교동 주민들의 요즘 가장 큰 바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거리는 배로 15분 정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요즘은 30분마다 한 번씩 강화 창후리와 교동 월선포 사이를 잇는 배가 있어 사정도 나아졌다. 하지만 바닷물이 빠질 경우엔, 바다 속 모래톱이 드러나 4시간 가량을 돌아가야한다. 이 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는 주민들의 불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강화와 교동을 잇는 다리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주민 한주현(66)씨는 "강화도와 연결하는 다리가 생긴다던데, 그럼 버스도 들어올 것 아니요. 죽기 전에 버스 타고 강화로 나가볼 수 있을는지. 가능할까?"라며 연륙교가 빨리 세워졌으면 하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교동도는 강화의 부속 섬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전국적으로도 13번째로 크다. 북쪽으로는 황해도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한강 하류와 맞닿아 있다.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고려시대 때는 벽란도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에 기점역할을 하고, 조운선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도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도 했다.

▲ 교동도는 섬답지 않은 섬으로 전형적인 농촌으로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간석지로 이루어진 논으로 광활한 농지 곳곳에 농촌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섬 대부분이 간석지로 조성된 교동도는 '교동에서 풍년이 들면 교동사람들은 13년을 먹고, 강화 전체사람들은 3년을 먹고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한 토질을 자랑한다. 원(元)군에 대한 항쟁이 장기간 가능했던 이유도 이처럼 풍족한 농사가 뒷받침됐을 것이라는 풀이다. 그 때문인지 교동도는 어업이 주를 이루는 여느 섬과는 달리, 지금도 농업이 주류를 이룬다. 전체 1천390여가구 중 1천여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 정도다.

2009년을 목전에 둔 지난달 29일 교동도에서는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밭에 등겨를 태워 땅의 힘을 돋우는 농군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교동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근 생산되기 시작한 '탑라이스'는 교동도의 비옥한 토질을 증명하듯 전국 최고 수준의 '미질'을 자랑한다.

교동도는 세상에 알려진 것에 비해 선조들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교동면 고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한증막'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한증막은 순전히 황토와 돌을 재료로 삼아 '돔' 형태로 축조됐다. 돔 아래 쪽의 작은 출입구는 마치 돌로 만든 '이글루'를 연상케 했다. 한증막에서 땀을 충분히 흘린 사람들은 주변의 시냇물에 들어가 몸을 식혔다고 한다. 이 한증막의 외형은 최근 복원됐지만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옛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한증막과 멀지 않은 곳에는 교동도가 연산군의 유배지였음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실 교동은 연산군뿐만 아니라 안평대군, 광해군, 임해군 등 조선시대 폐군과 종친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됐다. 육지와의 교통이 불편해 외부인과의 접촉을 자연스럽게 차단할 수 있고 서울과 가까워 유배인들에 대한 정보가 국왕이나 국왕지지 세력들에게 쉽사리 전달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최초로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상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교동향교'는 바로 유교 전파의 본산이다. '교동향교'는 지난 1286년 고려의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의 초상화를 갖고 돌아오면서 화개산 북쪽 기슭에 처음으로 모셨다가 조선 영조 17년(174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고 한다.

이 밖에 화개사, 화개산성, 삼도수군통어영지 등 곳곳에 눈에 띄는 문화재 표지판 등은 마치 지붕없는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 시간이 멈춘듯한 정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대룡시장. 이발관과 장의사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950~60년대 영화세트장이 그대로 있는 곳이 있다"는 주민의 설명에 대룡리로 향했다. 총 길이가 200여나 될까. 좁은 골목 사이로 적어도 30년 이상은 돼 보이는 건물이 즐비했다. 골목 입구에는 굵은 손글씨로 적혀진 '교동이발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시간을 뒤로 돌린 듯했다. 이 간판을 뒤로 하고 몇 걸음 앞으로 갔더니 이번엔 태엽·괘종시계부터 전자시계까지 빽빽이 들어찬 시계방이 있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옛 시계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내부엔 시계방 주인장 황세환(71) 할아버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40여년간 이 곳에서 시계를 수리해왔단다.

▲ 교동도 탑라이스.
황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 나온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던 골목이었지. 그때는 육지로 가려면 인천항까지 가야 했는데, 8시간이나 걸렸어"라고 옛 시절을 회고했다. 황 할아버지는 "다리가 놓여지면 좋아지겠지?"라고 묻더니 금세 표정이 환해졌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약방과 다방, 양복점, 그리고 노란색 페인트로 숫자가 칠해진 나무판으로 가려진 가게. 대룡시장은 좁은 골목 내부의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정겹기만 했다. 하지만 오는 2012년 당초 계획대로 다리가 완공되면 이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