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동도를 찾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월선포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현수막 문구다. 교동 주민들의 요즘 가장 큰 바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교동도는 강화의 부속 섬 중에 가장 큰 섬이다. 전국적으로도 13번째로 크다. 북쪽으로는 황해도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한강 하류와 맞닿아 있다. 해상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고려시대 때는 벽란도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에 기점역할을 하고, 조운선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도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도 했다.
2009년을 목전에 둔 지난달 29일 교동도에서는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밭에 등겨를 태워 땅의 힘을 돋우는 농군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교동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근 생산되기 시작한 '탑라이스'는 교동도의 비옥한 토질을 증명하듯 전국 최고 수준의 '미질'을 자랑한다.
교동도는 세상에 알려진 것에 비해 선조들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교동면 고구리에 자리하고 있는 '한증막'이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한증막은 순전히 황토와 돌을 재료로 삼아 '돔' 형태로 축조됐다. 돔 아래 쪽의 작은 출입구는 마치 돌로 만든 '이글루'를 연상케 했다. 한증막에서 땀을 충분히 흘린 사람들은 주변의 시냇물에 들어가 몸을 식혔다고 한다. 이 한증막의 외형은 최근 복원됐지만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옛 선조들의 치병과 목욕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한증막과 멀지 않은 곳에는 교동도가 연산군의 유배지였음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실 교동은 연산군뿐만 아니라 안평대군, 광해군, 임해군 등 조선시대 폐군과 종친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됐다. 육지와의 교통이 불편해 외부인과의 접촉을 자연스럽게 차단할 수 있고 서울과 가까워 유배인들에 대한 정보가 국왕이나 국왕지지 세력들에게 쉽사리 전달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최초로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상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교동향교'는 바로 유교 전파의 본산이다. '교동향교'는 지난 1286년 고려의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의 초상화를 갖고 돌아오면서 화개산 북쪽 기슭에 처음으로 모셨다가 조선 영조 17년(174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고 한다.
이 밖에 화개사, 화개산성, 삼도수군통어영지 등 곳곳에 눈에 띄는 문화재 표지판 등은 마치 지붕없는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약방과 다방, 양복점, 그리고 노란색 페인트로 숫자가 칠해진 나무판으로 가려진 가게. 대룡시장은 좁은 골목 내부의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정겹기만 했다. 하지만 오는 2012년 당초 계획대로 다리가 완공되면 이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