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울 노량진 공무원시험 학원가에서 '교정학'분야의 '절대' 일인자로 통하는 김모(38·수원시 장안구)씨. 지난달초 학원으로부터 '계약해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듣고선 한동안 말을 잃었다. 수업 때마다 강의실에 수험생 200~300명이 운집할 정도로 최근 3년간 '스타강사' 대접을 받아왔기에 김씨의 충격은 더 컸다. 김씨는 "선금을 주고 입도선매(?)해 왔던 학원이 남은 계약금도 포기하면서 계약을 일방적으로 끊었다"면서 "불황을 몰랐던 공무원 수험가가 이렇게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 2 3년간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경찰공무원 공채 및 교정공무원 특채 시험 준비를 해 왔던 김모(31·경남 진주시 상평동)씨. 지난달초 모든 수험생활을 접고, 고향 진주로 내려가 한 직업전문학교 IT 과정에 등록했다. 한 달 90만원이 넘는 고시원비와 학원비, 식비 등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2009년 공무원 채용 규모까지 축소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방대생이 유일하게 공정한 실력을 인정받는 통로였던 공무원 시험도 이제 ‘빈익빈 부익부’ 논리가 도입되기 시작했다"며 “청춘을 고시촌에서 썩힌 지난 3년의 세월이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로 고용시장이 꽁꽁 얼어붙자 ‘공시족'(공무원 시험 수험생)의 둥지인 고시촌과 학원가가 된서리를 맞고 있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안정적인 공무원 시험에 사람이 몰리게 마련이지만 올해부터 경기도 등 전국 16개 광역 시·도 지자체 채용인원이 대폭 감소한다는 소식에 공시족이 서둘러 이곳을 떠나고 있다.

7일 노량진 공무원시험 전문 학원들에 따르면 올 하반기 수강생은 예년에 비해 10∼20% 이상 줄어들었다. A학원 관계자는 “지자체뿐만 아니라 법원·경찰직 공무원 등 직능·직렬을 가리지 않고 수강생이 줄었다"며 “6개월∼1년 공부한 이들만 있을뿐 새로 또는 2년 이상 장기 준비하는 이는 싹 줄었다"고 전했다.

공시족 불안감을 자극한 건 무엇보다 큰 폭으로 줄어든 전국 지자체의 내년도 신규 채용 규모다. 새 정부 들어 조직 개편이 추진된 데다가 6급 이하 공무원 정년이 늘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임용되지 못하고 적잖은 기간을 대기해야 한다. 게다가 올해부터 경기불황 여파로 민간 기업 채용 규모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여 “하루라도 빨리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실제로, 행정안전부는 2009년 행정과 공안, 기술, 외무 등 4개 직렬 국가공무원 3천267명을 공개채용시험을 통해 선발한다고 지난달 1일 공고한 바 있다. 이는 지난해 4천868명보다 무려 32.8%가 줄어든 규모다. 경기도 역시 지난해 2천77명을 선발했지만 정부의 정원 지침 등에 걸려 최근까지 합격자의 29%인 596명만 임용됐을 뿐 나머지 1천481명은 하염없이 임용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으로, ‘임용대기자를 우선 활용하고 나서 신규 채용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채용 전망이 불투명하기만 하다. 더구나 올해부터 공무원 시험에 ‘연령제한'까지 폐지, 그간 나이제한에 걸려 공직의 꿈을 포기했던 3만명 이상의 직장인, 아줌마 등 ‘올드 공시족'들이 공시 대열에 합류할 전망이어서 합격의 꿈은 더욱 요원해지게 됐다.

공직에 준하는 신분과 임금을 보장받는 공기업도 공기업 선진화 작업과 정부의 경영 효율화 주문에 따라 사정이 좋지 않다. 기획재정부와 30개 공공기관에 따르면 한국전력과 토지공사, 주택공사 등 주요 공기업, 준정부기관의 올해 신규 채용 인원과 채용 계획인원은 946명으로 지난해 2천839명에 비해 66.7%나 감소했다.

이처럼 공시족들이 속속 짐을 싸기 시작하면서 주요 고시촌 일대 원룸과 독서실 가격도 하락하고 있다. 올 상반기 보증금 1천만원에 월 45만원 이상 하던 서울 노량진 일대 원룸은 이미 월 5만∼10만원 내렸다. A공인중개사 김모(42·여)씨는“9월 이후 물량이 많이 나오더니 10월 들어서는 방을 구하려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공시족들의 마음을 무엇보다 심란하게 하는 건‘일반기업 취업시장의 적응력도 만만치 않다'는 현실이다. 행정학 등 전문과목과 고시영어만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왔던 공시족들이 고득점의 토익점수와 각종 자격증, 공모전 수상경력 등 이른바 스펙(Specification)은 물론 압박에 가까운 면접, 원어민 수준의 회화능력을 요구하는 영어면접 등을 최단기간에 구비, 기존 경쟁자들을 제쳐낸다는 건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는 게 이들의 넋두리다. 때문에 한국폴리텍대학이나 직업전문학교, 사이버대학, 일반 2년제대학의 학사학위 소지자 특별전형 등으로 유턴하는 공시족들도 급증하고 있다.

수원 고려IT직업전문학교 이원종 기획총괄실장은 “팔팔한 젊은이들이 공무원에 대한 환상을 깨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공시족 이탈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적으로 전 채용시장이 얼어붙었다는 점에선 안타까울 따름”이라면서 “법학서적과 영어보다는 전문기술로 승부하는 취업시장 풍토가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