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동과 나란히 선 망월동에는 천주교 구산성지 때문에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강 물길 때문에 천주교를 일찍 접했던 마을이어서 그런지 1839년의 기해박해 때부터 순교자가 나온 마을이다. 그것도 세 형제와 그 아들 등 한 가족의 참혹사가 녹아든 곳이다. 그 주인공은 김성우(金星禹(禹集)·1795~1841) 안토니오 성인이다. 그는 이곳 구산에서 태어나 두 동생 만집(萬集), 문집(文集)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이 마을을 신앙공동체 마을로 키워나갔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는 천주교를 전파하고 프랑스인 모방 신부는 자신의 집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우리말과 풍습을 전하는 한편 교우촌을 발전시켜 나갔다.
세 형제는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김만집이 먼저 순교하고 김성우도 순교하였으며 문집은 18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붙잡혀 남한산성에서 1868년 순교한다. 이때 김성우의 아들과 만집, 문집의 아들 등도 순교한다. 구산 출신 9명의 순교자 가운데 7명이 한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깨끗하게 정비한 구산성지는 오밀조밀하면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성지 안에는 김성우 성인의 동상과 묘소도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성당도, 다른 순교자 묘역도 보인다. 이 묘역 안에 역시 한 가문이면서 천주교 신자였던 김교영(金敎永·1857~1923)의 묘소와 공적비가 눈에 띈다. 김교영은 독립유공자로서 1919년 62세의 나이로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군중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다가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왔으나 병사한다. 순교자와 성인의 피가 뜨겁게 전해진 탓이리라.
# 검단산과 창우동, 두미협의 팔당댐
하남시 창우동은 검단산 아래에 폭 파묻힌 듯 숨은 마을이다. 팔당대교로 드나드는 길목에 놓여서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드는데 산과 도로는 높고 마을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창모루길'이라는 표지와 나루터 표석, 그리고 붕어찜과 매운탕집 등 식당거리로 남았지만 이곳은 표석대로 나루터였고 또한 가까운 곳에 창(倉)을 지닌 마을이었다. 그래서 창모루(창 모퉁이), 창우(倉隅)아닌가? 창(倉)은 창고(倉庫) 가운데 고(庫)보다 큰 창고를 뜻하고 옛 지도에도 표기한다. 그렇다면 창우동의 평탄지역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창이 설치되었던 곳이고 그 창의 모퉁이에 나루가 놓였다는 뜻이리라. 창우동과 검단산 자락에는 조선말의 정객인 유길준과 가족의 묘를 비롯해서 한국일보 창업주이자 부총리를 지낸 장기영과 국내 굴지 기업을 일으킨 정주영과 그 가족의 묘역도 자리를 잡았다.
비슷한 높이에 크기를 지닌 검단산과 예봉산은 팔당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태를 뽐내는데 그 모습이 팔당호에 비치고 북한산이며 도봉산과 한강의 줄기 등 장쾌한 눈 맛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산이다. 창우동 창모루길 주변에는 하루 종일 등산객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만큼 명산이기 때문이다. 옛 광주부의 진산으로도 꼽혔던 산이니 두말하면 무엇하랴! 검단산은 또 조선시대 왕과 왕족들의 사냥터나 사냥을 구경하는 산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검단산과 예봉산 두 산이 맞닿은 곳은 협곡을 이루고 그 협곡을 막고 들어선 댐이 팔당댐이다. 본래 이곳은 두미협(斗尾峽), 도미(渡迷)·두미(斗尾)·두미(斗迷) 등으로도 문헌에 나오는데 한강 본류 가운데 가장 험한 뱃길이기도 하다. 이 두미협을 민간에서는 뒤미협이라고도 불렀다는데 배를 타고 지날 때 하도 긴장하고 뒤에 힘을 주어서 뒤가 미어지는 협곡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두미협에서 다산 정약용은 그 형제들과 함께 큰형의 처남인 광암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고 기록에 나온다. 구산성지와 천진암성지, 그리고 절두산성지 등이 한강과 관계가 깊은 것도 물길이 곧 종교와 문화의 전파로임을 증명한다.
# 미사동, 두미협 아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과 같은 모래섬들판
미사동은 미사리로 더 알려진 마을인데 가수들의 라이브 카페가 하나 둘 들어서면서 서울과 인근 지역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거리가 되었다. 유명가수의 이름을 직접 내걸고 영업을 하거나 출연 가수들의 이름 또한 큰 글씨로 걸었다. 서울의 천호동이나 암사동과 가까운 거리이면서 하남시에 들었으며 한강변의 풍치를 마음껏 구경하니 더없이 좋은 낭만의 거리가 되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끼고 달리는 도로는 자동차 유람객의 길로도 각광을 받았고 이국적인 건물들과 실내 장식은 예비 신혼부부들의 야외 촬영 장소로 인기를 끈다. 게다가 각종 음식점과 찜질방 등 휴게시설도 들어서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발전해가는 거리가 되었다. 조정경기장 앞 도로에만 30여 곳이, 또 조정경기장과 작은 호수 사이 마을길로 들어서면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미사동은 원래 한강의 커다란 모래섬이었다. 큰물의 피해만 없으면 농사도 제법 잘 되었다고 한다. 상류에서 내려온 퇴적토가 들판을 기름지게 하였을 것이다. 광무 9년(1905)에는 미사동과 주변 마을 사람들이 탄원서를 올린다. 수백 호의 주민들이 수십 년간 수어청의 들판을 경작하였는데 일본인이 조선인 앞잡이를 내세워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궁내부의 인가를 받았다고 하면서 횡포를 부렸는데 이를 바로잡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미사리 큰 섬은 그러나 1925년의 큰물 때 당정섬, 둔지섬과 함께 세 개의 섬으로 나뉘었고 1972년에도 큰비가 내려서 상습 침수지구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을 망월동으로 이주하게 하였다. 망월동이지만 미사리의 80여 가구를 옮겨왔다고 해서 신미사촌으로 불렀다. 강변과 섬 사이에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조정경기장이 들어서고 서울올림픽 때는 조정과 카누경기장으로 사용하면서 섬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6년에는 경정장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모래땅이어서 황무지처럼 방치하기도 해서 한때는 공수특전단의 공중낙하 훈련장이 되었고, 또 땅콩 농사를 주로 짓던 마을이 이제는 많이도 변하였다.
# 각 시대 유적이 층층이 쌓이고
예전에 섬이었던 미사동 마을로 깊숙이 들어가면 한강과 만난다. 강 건너에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의 아파트들이 옆으로 길게 벌려섰고 맑은 강물에 거꾸로 비치면서 새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많다. 이곳 한강 제방 바로 옆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유적이 층층이 드러나서 이름난 곳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층에서는 집터와 빗살무늬 토기와 그물추, 화살촉과 돌도끼 등이 나왔다. 청동기층에서는 37곳의 움집터와 석기류 및 토기류가 나왔고, 백제시대 유적으로는 집터와 저장 구덩이도 대량으로 발굴되었는데 특히 밭이 대규모로 발굴되어 농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는 암사동 선사유적지,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지와 더불어 한강 주변이 생산성과 주거 및 생활 터전으로 일찌감치 손꼽혀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은 계곡에 사는 계거(溪居)라 하였다. 둘째는 강거(江居)를 들었는데 너른 평야와 수로의 장점을 꼽은 것이다. 셋째는 바닷가에 사는 해거(海居)를 꼽았다. 아무래도 강거가 가장 무난했던 것이고 가치는 바뀌었지만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강변의 아파트가 더욱 인기를 끌지 않는가.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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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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