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미남 고교생의 종합선물세트: 대한민국 최고 재벌가의 후계자, 전 대통령의 손자, 국보급 예술가의 차남, 신흥 부동산 재벌의 상속자. 헬기 타고 등교, 구내식당 한 끼 5만원, 뉴칼레도니아 여행, 전용 제트기, 외제 스포츠카, 보석 박힌 드레스, 특급호텔, 성폭행, 왕따….

한국방송에서 절찬리(?)에 방영중인 '꽃보다 남자'라는 드라마의 설정이다. 일본만화가 원작이고 '판타지 로맨스'를 표방하니 다소의 과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제작자의 변도 있긴 하지만, 비현실적 황당 상황이 현실적 다수의 우울함을 더한다.

아마 여성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세탁소집 딸의 신데렐라적 성장을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할 것이다. 젊은 꽃미남의 달콤한 키스를 기대하기도 하고, 뉴칼레도니아의 파란 바다에 뛰어들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끝나면, 내가 누워있는 공간은 더 이상 남태평양의 바다가 아니다. 내 옆의 남자도 꽃미남이 아니다. 주인공과의 동일시 그리고 대리만족, 훔쳐보기로 고단한 생활을 잊고 싶지만 변하는 건 하나 없다.

호박으로 변해버린 마차, 다시 쥐가 된 백마, 누더기 옷…. 자정이후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의 모습은 더욱 서럽다. 차라리 성에 가지 않았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철거민의 농성장에서 몇 명이 죽었단다. 회사에 감원바람이 불었단다. 공장이 멈췄단다.

불황, 화재, 사망, 철거민, 망루, 재개발, 일당, 생계대책, 생존권, 구조조정, 백수, 노숙….

드라마가 끝나고 같은 텔레비전의 뉴스에서는 일상의 모습을 전한다. 즐겁지 않은 뉴스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다. 텔레비전이 미쳤다. 오죽하면 '막장(광산 갱도의 맨 끝)드라마'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불륜과 복수, 낄낄거리기를 넘어 그 자극의 도가 심하다.

왕년의 스타 개그맨은 요즘의 방송풍토를 술만 없지 술자리와 같다고 했다.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고민도 없고, 동시대인의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하기 위한 고뇌도 없다는 얘기겠지.

/문화커뮤니케이터·한국외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