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 무렵의 노서동고분군. 노을과 고분의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경을 빚어낸다.

이맘때면 경주가 가장 경주다울 때. 봄, 여름, 가을 내내 개구리처럼 오글대던 관광객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시는 한적하기만 하다. 천천히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한 대 빌려 타고 느긋하게 경주를 돌아보자. 오감으로 즐기는 경주 여행.

# 시각 : 신라의 달밤과 마주하다

밤의 경주는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주말이면 유적마다 화려한 조명이 들어온다. 경주의 밤거리를 걸으며 천 년 전 '신라의 달밤'을 상상한다.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첨성대 주변. 첨성대를 비롯해 대릉원, 노동·노서동 고분, 계림이 모여 있다. 오후 6시 무렵이면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다. 첨성대와 계림 주변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온다. 조명을 받은 앙상한 느티나무 가지들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첨성대에서 계림방면으로 길을 걷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둥그스름한 곡선의 능이 몇 기가 있다. 노동·노서동 일대의 고분이다. 해질 무렵, 봉긋한 고분의 곡선이 산의 능선과 어울려 절묘한 풍경을 빚어낸다. 가까운 능은 짙은 곡선을 만들어내고 먼 산은 옅은 곡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위로 노을이 장엄하게 번진다.

안압지의 화려한 밤 풍경도 꼭 봐야 한다. 안압지는 신라의 궁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연못.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최근 안압지의 아름다운 야경이 입소문을 타면서 디카족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 감포 앞바다에서 갈매기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

# 청각 : 파도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다

경주 동쪽 끝에 문무대왕릉이 있다.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납골이 뿌려진 곳이다. 문무대왕릉에서 감포항에 닿는 31번 국도는 겨울 바다의 낭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 대왕암에서 40㎞ 정도 떨어져 있다. 감포항은 꽤 큰 항구다. 감포 어시장에는 오징어와 멸치, 말린 생선, 미역, 김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포구 한편에서는 과메기와 오징어가 해풍에 말라간다. 방파제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눈이 아릴 정도로 하얀 등대가 서 있다.

바다는 겨울을 탄다. 추운 날일수록 바다는 심하게 몸살을 앓는다. 검은 수면은 한순간도 숨을 죽이지 않는다. 감포 앞바다에 서면 바다가 토해내는 신음소리와 가슴앓이가 생생하게 들린다. 검은 물빛에 마음이 찡해진다. 혹한의 추위에 볼마저 발그레해진 젊은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걸으며 파도소리를 듣는다. 겨울바다의 거센 파도소리는 자유와 해방감을 준다. 억눌렸던 감정도 파도처럼 꿈틀꿈틀 일어선다. 세속에 찌든 마음도 어느새 씻기는 것 같다.

▲ 황룡사지 한편에 쌓여 있는 석재들. 천년의 시간을 침묵하고 있다.

# 촉각 : 신라인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다

찾는 이 별로 없는 스산한 무렵 경주, 고요가 가득한 그 무렵 경주가 비로소 경주답다. 황룡사지에 가보시길. 광활한 폐사지를 이리저리 거닐어보시길. 황룡사지는 동서 288m, 남북 281m로 무려 3만여평의 규모를 자랑한다. 진흥왕 35년(574년)에 구리 3만여근과 황금 1만198푼이 들어간 본존불 금동장육상을 세우고 동양 최대의 목탑인 9층 목탑, 에밀레종보다도 규모가 4배 더 나간다는 황룡사종 등을 모두 만들어 사실상의 불사가 끝나기까지는 200여년이 걸렸다.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터에는 불상을 올려놓는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있다.

해질 무렵, 그 옛날 거대한 절을 떠받쳤을 돌무더기로 가서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돌들을 쓰다듬어 보시길. 황룡사지 서쪽 끝에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 절을 짓는데 사용됐던 돌들이 오글오글 앉아 있다. 황룡사를 떠받쳤던 커다란 주춧돌도 있고 맷돌도 있다. 어떤 돌은 연꽃을 새겼고 어떤 돌은 부처님 얼굴을 새겼다. 그 돌들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돌들을 쓰다듬으며 황룡사지에 천천히 깃드는 어둠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아늑해진다.


# 미각 : 경주를 맛보다

경주는 쌈밥과 해장국으로 유명하다. 쌈밥집은 대릉원 동쪽 편 골목 후문쪽에 몰려 있다. 배추와 상추, 호박 등의 야채와 함께 양념장, 젓갈, 막장 등이 나온다. 경주역 부근 팔우정 로터리에 있는 해장국집골목은 해장국과 함께 김치 장아찌, 해초, 콩나물, 메밀묵이 나온다. 맛이 담백하고 소박하다. 삼릉 앞에는 칼국수집이 십 여곳 모여 있다. 멸치와 보리새우, 다시마, 대파, 들깨가루 등을 넣고 푹 고아낸 국물에 우리밀과 콩가루로 반죽한 국수를 넣어 걸쭉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굵은 파를 넣고 지져낸 파전도 맛있다. 찰보리밥도 유명하다. 밥을 지을 때 찹쌀을 같이 넣어 짓기 때문에 푸석한 맛이 아니라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이 난다. 황남빵은 경주의 특산물. 65년 역사를 지닌 빵이다. 팥 앙금으로 소를 만들고 구워내 달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게 특징이다.

▲ 삼릉의 소나무숲.

# 후각 : 싱그러운 소나무 향기에 빠지다

삼릉은 56명의 신라왕 가운데 53대, 54대, 8대의 무덤이다. 동서로 세 왕릉이 나란히 있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이다. 멸망으로 치닫는 왕국을 목도해야 했던 불운한 왕들이 잠들어 있다.

삼릉 주변의 소나무숲은 경주에서도 최고로 친다. 입구에 들어서면 하늘 높이 솟아오른 소나무 두 그루가 X자 형태로 엇갈려 여행객을 맞이한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20여m 가면 삼릉이 나오는데 굵은 소나무와 가는 소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이 희한하다. 숲은 솔향기로 가득 차 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 싱그러운 솔향이 가슴 가득 들어찬다.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머릿속이 청명해진다. 숲을 거닐다보면 솔향 뿐 아니라 낙엽 냄새도 느껴진다. 구수한 연기냄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 향은 천년 전에도 똑같았을 것이다.

아침이면 삼릉 소나무숲은 우윳빛 안개로 뒤덮인다.안개와 소나무가 빚어내는 풍경을 찍기 위해 가을, 겨울 무렵이면 사진가들이 많이 찾아온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인 배병우씨도 삼릉에서 그의 대표작을 찍었다.

■ 교통: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경주 IC로 나온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시내 쪽으로 가다보면 첨성대. 황룡사지는 구황동에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안압지 뒤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500m가면 황룡사지가 나온다. 경주 IC에서 직진해 4번 국도를 타고 가면 감포다.

■ 숙소: 보문단지에 경주 힐튼호텔(054-745-7788), 호텔 현대(054-748-2233) 등 특급호텔이 많다. 경주조선온천호텔(054-740-9600)에서는 온천욕도 즐길 수 있다. 마그네슘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 먹거리: 삼포쌈밥(054-749-5776)은 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인이 직접 기르는 신선한 쌈과 야채를 비롯해 13찬이 나온다. 찰보리밥으로 유명한 숙영식당(054-772-3369)은 대릉원 입구에 있다. 단감농원 할매집(054-745-4761)은 삼릉에 있는 여러 칼국수 집에서도 원조격.

글·사진/최갑수 여행작가 ssucho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