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상을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일하다 퇴직을 맞은 우리시대 가장들은 은퇴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원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본격화 된 경기불황은 이같은 퇴직자들의 꿈을 산산조각내고 있다.성장 없는 경제 상황으로 인해 퇴직자들의 가장 큰 노(老)테크 수단이었던, 은행 이자는 사실상 제로금리로 추락했으며, 소비심리 악화와 부동산 가치 하락으로 퇴직자들의 꿈인 '임대사업자'의 꿈도 예전 같이 풍요롭지 못하다.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이뤄지는 구조조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후배 실업자들로 인해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창업이나 재취업도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퇴로가 막힌 50, 60대 퇴직자들은 '신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오늘도 노심초사 하고 있다.

# 제로금리 시대, 퇴직자 '이자 소득은 없다'
예전 50, 60대 은퇴 퇴직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생활비 마련 방법은 퇴직금 등을 은행에 예치, 이자 소득 등으로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기불황으로 인한 잇따른 기준 금리 인하로,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가 사실상 제로금리에 가까워지자 이같은 이야기는 옛말이 됐다.

같은 경기불황이어도 10여년 전인 외환위기 당시에는 은행들이 자금 유치를 위해 두자릿 수 이율의 예금 상품도 등장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권의 1년 만기 예금금리는 최근 4%까지 추락한 상황이다.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은행들의 저축성 예금 평균 금리는 6.31%로 2001년 1월(6.66%) 이후 가장 높았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만에 2% 포인트 가량 급락하면서 이자소득에 대한 세금(세율 15.4%)까지 빼면 소비자들이 실제 체감하는 실질금리는 제로 수준인 상황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1억을 넣어놔도 연간 수익이 400만원 이하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에 사실상 예전처럼 1년만기 예금으로 수익을 얻고, 또다시 고수익 예금에 가입해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은 이제 불가능하다"며 "펀드 및 채권 등 다른 투자상품은 위험성이 높아 퇴직자들이 기피하는 상품이어서 사실상 마땅한 투자 상품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지금이야 개인연금 상품 및 변액 보험 등 은퇴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상품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목돈마련으로 인한 이자 소득이 최상의 방법이었기에 노년층의 생활자금 마련에 대한 어려움도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 임대수익도 없다
지난해 금융공기업에서 명예퇴직한 한모(52)씨는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고민이 크다.

한 때 퇴직후 한적한 시골마을에 내려가 새로운 집을 짓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며 사는 것을 꿈꿨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가 됐다.

그가 중간정산분을 제하고 손에 넣은 퇴직금은 1억원 남짓. 그동안 투자한 예·적금 상품 등을 합하면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하고 2억원 가량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가 은퇴후 재테크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임대사업.

하지만 최근 들어 경기불황으로 빈 점포와 주택이 늘어, 상가나 오피스텔을 매입하더라도 마땅한 세입자가 나타날 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고 있다.

그는 "솔직히 7억원(주택포함) 되는 자산으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은퇴하더라도 자식들 결혼자금까지 모두 해결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며 "하지만 현 자산을 불리거나, 이를 활용한 재테크가 어려우니 이제는 집팔아서 생활해야 할 처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7년전 퇴직한 윤모(65)씨도 퇴직후 한동안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퇴직과 함께 퇴직금과 살고있던 아파트를 처분, 3층짜리 상가주택을 매입해 노후자금을 마련한 것.

상가주택을 통해 그에게 들어온 매월 임대 수익은 240여만원. 하지만 지난해부터 시작된 경기불황 바람과 전세가 하락으로, 세입자들의 계약만료후 새로운 세입자를 찾지 못해 빚을 내 계약금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윤씨는 "현재 입주해 있는 세입자들도 월세를 낮추거나, 재계약시 보증금을 내리길 요구하고 있다"며 "한때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노후를 산다고 생각했지만, 불과 몇년만에 생활고를 겪는 노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퇴직자들이 노후자금마련으로 사용하던 '노테크' 방법은 바로 상업용 건물이나 점포를 매입. 임대 수익을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들어 상업용 건물의 기준시가가 제도 도입 이후 처음으로 하락하고, 오피스텔의 기준시가 상승률도 크게 둔화되면서 실물경기 침체 여파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 부동산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서 시가의 80% 수준에서 국세청이 고시한 상업용 건물의 올해 평균 기준시가는 지난해보다 0.04% 하락했다.

또한 지난 2006년 15%를 넘어섰던 오피스텔 기준시가 상승률도 지난해에는 2.96%로 상승률이 크게 둔화됐다. 상가정보연구소 관계자는 "사실상 권리금도 찾아보기 힘들며, 임대료 역시 반토막 난 상가가 크게 늘어난 상황이어서 특A급 상권이 아닌 이상 예전같은 임대료 수익을 추구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3중고 겪는 퇴로막힌 퇴직자
행복한 퇴직을 꿈꿨지만 이처럼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든 퇴직자들은 또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빠진 경기만큼이나 재취업이나 창업의 길도 쉽지만은 않다. 게다가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부도, 감산, 조업중단 등으로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같은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실제 창업시장 관계자들은 올해 창업시장의 화두로 '경기불황 지속'과 '잠재적 창업 수요 증가'를 꼽고 있다. 대기업 퇴직자들이 창업시장에 대거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면서도, 워낙 내수경기가 가라앉아 있어 퇴직금을 쉽사리 '제2의 사업'에 투자하기를 주저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에 50대 이상 퇴직자들의 창업붐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재취업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자유기업원 등은 올해 실업자 수를 최대 100만명 이상으로 예측하는 상황에서 50,60대 퇴직자들은 실질적으로 30,40대 재취업 희망자들에 비해 재취업 기회를 제공하려는 기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나마 아파트 경비나 환경 미화 등의 직종도 구인을 원하는 수요가 적을 뿐만 아니라 임금 역시 최저 생계 수준으로 퇴직자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산은 없다. 주택연금 신청 급증
용인시 상현동에 거주하는 오모(69)씨는 20여년전 은퇴후 은행 이자 소득 및 자녀들이 주는 용돈 등 월 200여만원의 돈으로 부인(67)과 생활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경기 한파의 영향으로 이자 소득 등 실질적 소득이 줄어들고 자식들마저 어려운 경기상황에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씨 부부는 생활고에 직면하게 됐다. 게다가 부동산 가치 하락으로 자신 소유의 아파트 마저 가격 하락 추세를 보여, 박씨는 더 늦기전에 주택연금 가입을 결심하고, 지난해 11월 주택금융공사의 문을 두드렸다.

오씨는 "주택연금 가입후 월 150만원 가량을 수령받고 있다"며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어졌지만, 생전에 부담되는 일을 하지 않게 돼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퇴로가 막힌 퇴직자들은 이제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주택연금을 활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주택연금은 주택은 있으나 특별한 소득원이 없는 은퇴 퇴직자가 주택을 담보로 사망할 때까지 자택에 거주하면서 노후 생활자금을 연금 형태로 지급받고, 사망하면 금융기관이 주택을 처분해 그동안의 대출금과 이자를 상환받는 방식이다.

정부는 최근 늘어나는 퇴직자들의 생계 지원을 위해 주택연금 가입대상을 현 65세에서 60세까지 낮추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주택금융공사 경기지사에 따르면 지난해 경기도내 주택연금 가입은 모두 269건으로 집계된 가운데 상반기에는 101건이 공급된 반면 경기불황이 본격화 된 하반기에는 무려 168건이 접수돼 경기불황에 따른 주택연금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주택연금의 경우 지난 2007년 7월 출시 이후, '상속'이라는 국내 정서상의 이유로 활성화의 어려움을 겪어 왔지만, 최근의 경제난으로 인해 무소득층 은퇴자들이 생활고에 직면하면서 가입이 급증하는 추세에 있는 것. 실제 실물경기 침체가 가시화 됐던 지난 10월에는 전국적으로 78건의 가입 신청이 접수돼 출시 이후 월별 최고치를 달성하기도 했다.

주택금융공사 경기지사 함태규 팀장은 "어려워진 경제상황으로 예전에 준비했던 노후자금만으론 풍요로운 생활이 어려워져 자식들과의 상의 끝에 주택연금에 가입하는 퇴직자들이 늘고 있다"며 "가입연령이 낮춰지고 경기악화가 본격화 되고 있는 만큼 주택연금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