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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 병목안마을 전경. 밖에선 보이질 않으나 안이 넓은 곳, 수리산 품안에 있어 천혜의 경관을 간직한 넓은 터, 안양시 안양9동의 병목안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때부터 있던 철도용 채석장이 지금은 번듯한 문화예술공원으로 변신했다. 현재 수리산과 함께 문화 및 생태계가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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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안양9동 병목안마을은 입구가 병목처럼 좁고, 수리산에 둘러싸인 안쪽은 깊고 넓다. 그래서 '병목안'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우리 조상들은 좁은 입구로 외부와 연결되어 있고 안은 넓으면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을 난(亂)을 피하기 좋은 '보신의 땅'으로 여겼다. 안양 병목안은 입구가 좌측으로 크게 틀어져 있어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보신의 땅이다. 그래서 19세기 서학(천주교)이 박해를 받을 때 서학교도들은 병목안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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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목안은 많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한국전쟁 때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고, 일제 강점기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이곳에는 단단한 자갈이 많아 경부선과 수인선 선로를 보수하는데 사용됐는데, 채석한 돌을 나르기 위해 안양역에서 병목안까지 철도가 있었다.
그래서 병목안 답사는 안양역에서 출발해 지금은 흔적만 남은 철길을 따라 가야 제 맛이 난다. 안양역 광장 건너에 있는 대성빌딩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 더 가면 골목이 나온다. 열차 1대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인데 이 길로 기차가 다녔다. 그래서 길 이름도 '철도길'이다. 철도길을 따라 가다가 397번 도로를 건너면 삼덕길이 나온다. 삼덕길을 지나 수암천을 우측으로 끼고 걷다 보면 수암천 건너에 율목주공아파트가 보인다. 이 일대가 병목안 입구인데 수암천은 여기서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병목안은 산으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가 않는다.
# 한국전쟁과 피난민촌, 1977년 안양 대홍수
율목 주공아파트가 있는 수암천변을 '피난민촌'이라 부른다. 피난민 촌은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평강에서 온 피난민들을 집단 거주시키면서 붙여진 지명이다.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평강이 휴전선 이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7년 7월 8일 안양대홍수 때 산사태로 인해 8가구 29명이 몰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수해로 인해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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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원신씨. |
일제강점기까지 병목안에는 40여 호가 띄엄띄엄 사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하고 일부는 채석장이나 병목안 바깥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지금 병목안은 아파트도 많이 들어서 있고 7천세대 이상이 사는 거주지로 변했다. 해방 이후 안양이 안양역 앞을 중심으로 공업도시로 발전하면서 바로 이웃한 병목안 인구도 늘어난 것이다. 안양하면 떠오르는 삼덕제지와 금성방직도 모두 병목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병목안에는 한증막도 몇 개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한증막이 병목안 시민공원 건너에 있는 수리산 한증막인데 1960년대부터 있었다 한다. 수리산 한증막은 지금도 여성전용 한증막인데, 예전 주 고객은 병목안 입구의 공장 여성노동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답사를 함께한 변원신(76)씨는 병목안에서 태어나 마을 이장도 지냈고 지금까지 안양에 살고 있어 안양의 역사를 잘 아는 분이다. 그에 따르면 1960년대 무렵 현재 금용아파트가 있는 자리에 저수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이 추진됐다고 한다. 지질조사를 하니 저수지로 조성하기 어려운 지반이라 계획이 취소됐는데, 이 때 저수지가 조성됐으면 병목안은 지금보다 더욱 수려한 경관과 생태계를 지닌 곳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채석장 터가 시민공원으로 변하다
병목안은 시민공원 입구까지만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안에는 음식점만 몇 채 있어 비교적 환경이 훌륭히 보전되어 있다. 시민공원을 끼고 있는 수리산은 삼림욕장으로도 꽤 알려져 있다. 삼림욕장 입구에는 석탑이 있다. 산도 그리 높지 않아 편안하게 숲 길을 걸을 수 있어 많은 이들이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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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환 성지. |
시민공원 앞에서 도예교를 건너 골짜기 깊숙이 들어가면 수리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서울외곽순환도로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지나면 천주교 성인 최경환(崔京煥·1805~1839)의 생가와 묘가 있다. 최경환은 1830년대 초에 이곳에 들어와 천주교도들과 함께 촌락을 형성하고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도들은 담배를 경작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래서 이곳을 '담배골'이라 부른다. 최경환은 한국교회사상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崔良業)의 부친이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낸 후 1836년 신부가 되기 위해 담배골을 떠났다. 1839년 천주교 박해 때 담배골 천주교도들은 관헌에 붙잡히는데, 최경환은 부인 이성례와 아이들까지 함께 잡힌후 한양으로 압송돼 옥에 갇혔다. 최경환은 배교를 거부하였기에 40일간 모진 형벌을 받다가 옥사하였으며, 이성례도 이듬해 당고개에서 참수당했다. 담배골은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어 현재 많은 천주교도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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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등산객들. |
17세기 조선사회에는 중국을 통해 서학이 들어왔다. 서양과학서와 함께 천주교서적이 들어온 것이다. 학자들이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을 믿게 되었고, 조선사회에는 세계 가톨릭사에 드물게 자생적인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18세기 정조 때에도 천주교는 금압(禁壓)의 대상이었으나, 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조 사후 조정은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기해박해) 도 그 중 하나이다.
19세기 천주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서양과학도 함께 배척돼 조선사회는 근대사회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동력을 놓쳐버린다. 비슷한 시기 일본도 천주교를 박해하였으나 서양과학을 받아들인 것과는 비교가 된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개방성의 차이가 두 나라를 전혀 다른 길로 가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강진갑 한국외국어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