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지역 역사의 현장은 항상 경인일보가 가장 먼저 찾아서 기록하고, 알렸다.
경인일보는 언론의 불모지라 불렸던 경기·인천 지역에서 태동해 최고의 역사에 힙입어 21C 정보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최고정론지로서 또다른 미래를 선도하고 있다.
# 1960년 '새 신문이 나온다'(1960~1980)
경인지역 언론의 주춧돌인 된 인천신문(경인일보의 첫 이름) 창간에는 이제는 고인이 된 허합 초대 사장의 역할이 컸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계몽을 통한 인재양성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허합은 인천시 중구 사동의 한 창고건물을 매입해 인천신문의 첫 호를 발행한다.
1면 '정치·경제', 2면 '사회' 등 당시 총 2개면으로 발행된 신문은 군사정권의 검열속에서도 정치와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기사들로 시민들의 큰 관심을 이끌었다.
인천신문이 창간 8주년을 맞은 1968년 8월15일에는 경기연합일보로 첫 제호변경을 단행한다. 인천은 물론 경기권역까지 기틀을 넓혀, 명실상부한 경인지력 정론지로써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이듬해인 1969년에는 본사를 인천에서 수원시 교동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이후 1970년 10월 향토지로의 한단계 도약하기 위해 연합신문으로 또다시 제호를 개제했으며, 1973년 9월에는 경기지역의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를 흡수·통합해 '경기신문'이란 이름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 경인일보, 큰눈과 큰생각으로 다시 태어나다(1980~1994)
경인일보는 1982년 3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경인지역의 향토정론지로써 대대적인 지면개혁 작업에 나선것.
이 당시 현재 제호이기도 한 '경인일보'라는 이름이 첫 선을 보였다. 9대 임상규 사장 재임시절에는 경인일보가 다시 한번 재도약의 기회를 마련,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22-11번지에 대지 5천600㎡, 연건평 6만5천㎡의 사옥(현재 사옥)을 신축·이전했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시민들에게 한발 더 다가가기 위해 수원역 광장에 뉴스속보 전광판을 설치, 경인지역 뉴스를 보다 빨리 도민들에게 전했다. 한편 1988년 3월15일에는 편집국 기자들이 주축이 돼 경인일보 노조가 탄생했다.
# 경인일보 미래를 밝히다(1995~현재)
경인일보는 1995년 인천분실을 본사 체제로 승격시키고 경기, 인천 지역의 최고 신문으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한다.
1998년에는 인터넷 홈페이지(www.kyeongin.com)를 개설해 새로운 웹시대를 맞아 시대의 흐름에대 발 빠르게 대응했으며, 석간으로 발행되던 신문도 조간신문으로 변경됐다.
독자들의 독이성을 높이기 위한 가로 전면쓰기도 이때부터 시행됐다. 2005년에는 지방지로써는 유례없이 해외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 '북경경인문화교류유한공사'를 설립해 한·중 우호협력에 큰 기여를 했다.
이에 지난해 경인일보 창간일에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곤붕전시(사업이 거침없이 잘 되라는 염원을 담은 말)'라는 친필 휘호 현판을 경인일보에 전달해 국내외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인일보는 2천년대 들어서는 지역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수행해 다시한번 경인지역을 위한 경기도민, 인천시민에게 사랑받는 신문임을 확인한다.
'아줌마 축제·농산물 큰잔치', '프랜차이즈 박람회', '여주세종대왕마라톤', '인천바다그리기대회', '학생보훈백일장', '경인히트상품' 등은 이제 지역사회 주요 행사로 자리잡았다.
송광석 경인일보 대표이사는 "경인일보는 그동안 독자와 지역 사회의 과분한 사랑 속에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일등신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춰왔다"며 "창간 5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경인일보는 이제 '최고의 신문'을 넘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유일한 신문'으로 독자 앞에 서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