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시 승격 20주년을 맞은 군포시의 도시정체성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산본신도시'와 '수리산'이다. 전자는 군포시에서 쉼 없이 진행되는 도시개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서 후자는 군포시가 쾌적한 자연환경을 지닌 도시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수리산의 산줄기에 둘러싸인 속달동(速達洞)이 특히 그런 곳이다.
# 산 속 깊이 있어도 소통이 잘 되어 속달?
속달동은 세 개의 마을로 나뉜다. 그중 동명의 유래가 된 속달이 가장 바깥에, 덕고개가 그 다음에, 그리고 납덕골이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세 마을 모두 안양~군포~안산을 잇는 47번 국도변에서 수리산 방향으로 한참을 들어간 곳에 위치하기에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승용차나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물론 시간이 허락한다면, 자전거나 도보로 이동하며 마을과 길과 산과 들과 호수를 음미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수리산 깊숙이 위치하고 주민 수도 300여 명에 불과한 속달동에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가 여의치 않다. 마을 내에 작은 상점이 없지는 않지만, 주민들은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서 인근 대야미동까지 나간다. 과거에는 더더욱 그랬다. 가까이는 반월이나 군포 역전, 안양, 멀리는 수원에 서던 5일장을 이용했다. 실생활에 필수적인 소금을 사려해도 지금은 사라진 군자염전이나 소래염전에 직접 가서 사오곤 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물건 하나 사려면 한나절을 소모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가면 이곳이 외진 곳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과천과 안산, 수원과 안산 같은 읍치와 읍치를 잇는 가장 가까운 경로가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토박이 정형수 옹은 속달의 뜻을 이렇게 풀이하기도 한다. "여기가 속이라고 해도 소통이 잘 된다"라고.
# 속달동은 군포시 전통문화의 보고
아직까지 개발의 바람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기 때문일까? 속달동은 군포시의 대표적 문화유산과 전통문화의 보고로서 역사교육장과 답사코스로 즐겨 이용되고 있다.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동래부원군파 묘역과 종택이 이곳에 있다. 효종의 딸 숙정공주와 사위 정재륜의 묘를 비롯한 옛 인물들의 묘도 곳곳에 산재한다. 정난종을 파시조로 하는 동래정씨 동래부원군파는 조선시대에 정승판서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로서 지금도 속달 마을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또한 천년 고찰 수리사도 속달동에 있다.
속달동에서는 무형의 문화유산도 잘 전승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덕고개 군웅제로 불리는 마을신앙이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밤에 행해지는 군웅제는 덕고개와 납덕골 주민들이 한 해 동안 마을의 무사안녕과 가을의 수확에 감사하는 의미로 마을의 신에게 드리는 제의다. 이 제의가 행해지는 곳은 덕고개 당숲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숲이라고는 하지만, 그 면적은 고작 수백 평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마을숲'의 하나로 선정되었을 만큼, 그 아름다움이 사시사철 새롭게 다가오는 숲이다.
# 속달동의 겨울 풍경 속에서 변화를 보다
거주하는 세대라고 해야 120여 세대에 불과하고 노년층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속달동이지만, 이 겨울 그곳에서는, 그중에서도 납덕골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공동육아시설 두 곳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에 물을 대어 조성한 얼음 썰매장을 찾은 지역 내 유치원생들과 어린 학생들 때문이다. 그렇게 겨울놀이에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이곳이 개발의 손길에서 한걸음 물러난 채 농촌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곳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속달동이라고 해서 개발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 개발 바람에 휩쓸리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수리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은 속달동의 자연환경이 잘 보전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개발에 대한 기대와 보전이라는 당위성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주민들은 스스로 그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썰매장을 뒤로 하고 수리사(修理寺)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면, 경기도 산림환경연구소 담장에 눈길이 머물게 된다. 거기엔 동화책에서 본 듯한 그림들이 알록달록한 빛깔로 그려져 있다. 덕고개와 납덕골 주민이 마을가꾸기를 위해 노력한 첫 번째 결과물이다. 이제 시작 단계이고, 앞으로도 마을 담장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꿔갈 계획이라고 하니, 그러한 노력들이 어떠한 결실을 맺을지 기대된다.
■ 조선시대 어느 여인의 흔적을 찾아서…
관비 한계, 정치화 소실 '신분상승'… 노비찾는 쇄령 내려지자 독약자결
필자는 속달동을 종종 방문하는데, 그럴 때마다 꼭 찾아보고 싶던 문화유산이 하나 있었다. '청주 한씨 묘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도상에 표시된 지점과 그 주변을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차례 헛걸음 했음에도 그것을 찾고자 하는 바람은 식지 않았다. 간절한 바람이 통하였을까? 얼마 전에 드디어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날도 한 시간 넘게 산 속을 헤매다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산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때 우거진 수풀 속에 감춰진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청주한씨 묘표'였다. 그러나 '드디어 찾았구나!'하는 기쁨도 잠시, 그 모습은 자기 주인의 운명과도 닮은 듯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 묘표의 주인은 한계(韓係)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1643년 태어나 1669년 스물일곱 나이에 요절했다. 그녀의 죽음은 병이나 재난 때문이 아니었다. 관비(官婢)였던 그녀는 1665년에 자신을 속량해준 정치화(鄭致和)의 소실이 되어 임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 집안사람들을 대함에 예를 다하여 모두에게서 귀여움을 받았던 듯하다. 그러나 천하디 천한 관비에서 양민의 신분으로 살게 된 시간도 잠시뿐이었다. 없어진 노비들을 찾는 쇄령(刷令)이 내려졌고, 정치화는 그녀에게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 이후 그녀는 갑자기 병색이 짙어졌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독약을 먹고 자결한 것이다. 그때 그녀의 베갯머리에는 이런 편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고 한다. "차라리 목숨을 끊어 아래로는 제 마음을 온전히 하고 위로는 상공의 은혜에 보답을 하여 지하에서라도 부끄러움이 없고자 합니다."
끝내 목숨을 끊어야만 했던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자신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임을 원망하며 죽어갔을까? 잠시 동안의 행복을 뒤로 한 채 관비의 신분으로 되돌아가기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일까?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살았던 한계,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은 묘를 쓰고 묘표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불쌍한 그녀의 생은 죽어서도 마찬가지가 된 듯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빛조차 잘 들지 않는 숲 속에 묘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묘표로만 외로이 남았으니 말이다.
/이상열 군포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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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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