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사숙이 있었던 금곡동 창영초등학교 현 강당모습.
 
   다소 생소한 의미의 '사숙(私塾)'은 지금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학교가 탄생하기 이전의 교육기관이다. 옛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이뤄졌던 우리의 글방은 조선말까지 존속했었다. 이 글방은 경술국치 후에도 10여년간 지속됐으나 신식 과학 문명에 각성하고 중국의 위세가 축소되면서 자연도태됐다. 이 글방을 '서당' 또는 '사숙'으로 불렀다.

   성인들은 사숙에서 달마다 일정한 수업료를 내고 천자문에서 동몽선습 계몽편, 자치통감, 소삭, 사서오경을 배웠다. 따라서 사숙은 지금으로 따지면 과외나 사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현재 서울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의 시초는 사립법률대학격인 '양정의숙', 휘문도 '휘문의숙'으로 출발했다.

   사숙은 학과나 학년별로 나누지 않고 선생 한 사람이 두루 가르쳤다. 따라서 얼마되지 않는 월사금을 받아 수십명의 학생들에게 골고루 학문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당시 선생의 능력은 탁월한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누추한 방에서 1년 중 3대 명절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글소리를 내게 하는 혹독한 교육 훈련으로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까지 낳았다.

<이희동기자·dhl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