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연합뉴스) 헝가리는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10여년간 동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옛 공산권 국가 중 가장 먼저 서방에 문호를 개방했고, 성공적인 외자 유치를 발판으로 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시장경제에 가장 발 빠르게 적응, 모범적인 체제 이전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99년 헝가리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3천여 달러로 한국, 이스라엘,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 비슷했다.

   그러던 헝가리가 불과 수년 만에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등 주변 국가들에 추월당하고 급기야는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 원인은 뭘까.

   현재 동유럽의 경제위기는 기본적으로 과도한 외자의존형 경제가 안고 있는 취약점이 미국발 금융위기로 노출된 것이지만 이는 비단 헝가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의 '선두주자'였던 헝가리가 주변국들보다 더욱 심하게 흔들리게 된 원인은 정치적 불안정과 국민의식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헝가리 정치권에 언제부턴가 포퓰리즘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 국가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헝가리인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하고 저항적 기질이 강한 탓에 1989년 탈 공산주의 이후 2006년까지 단 한 번도 한 정당이 연속 집권에 성공한 사례가 없다.

   중도좌파인 집권 사회당(MSZP)과 현재 제1야당인 우파성향의 피데스(Fidesz)는 사회당이 2006년 처음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기 전까지 4년씩 번갈아 집권했다. 양당은 재집권을 위해 연금 인상, 공무원 봉급 인상, 복지수준 대폭 향상 등의 무리한 공약을 남발했고 집권 후에도 개혁보다는 인기영합적인 정책에 매달렸다.

   부다페스트 코르비누쉬 대학 갈라이 산도르 교수가 "헝가리의 선거는 연금 수령자들을 위한 선거"라고 꼬집은 것은 시사적이다.

   물론 현재의 경제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은 2002년부터 집권한 사회당과 쥬르차니 페렌츠 총리라는 야당의 주장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지만 야당인 피데스가 집권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권의 포퓰리즘화는 극심한 재정 적자 확대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헝가리의 2006년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9.2%로 유럽연합(EU) 국가 중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으며, 이때부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한 고강도 긴축 정책이 시작됐다.

   부가가치세 등 세금이 대폭 인상됐고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이어 체제 전환 이후에도 무상 시스템을 유지해온 비효율적인 의료.교육 부문에도 매스가 가해졌다.

   그러나 총선 전 '장밋빛' 공약과는 다른 개혁 조치에 국민은 반발했고, 지난해 3월 300포린트(당시 환율로 1천500원)의 의사 왕진비와 입원비, 대학 수업료의 10%의 국민 부담을 골자로 하는 국민투표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됐다.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킨 시스템 개혁은 국민적 저항에 발목을 잡혔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커질 때로 커졌다.

   긴축 정책은 재정 적자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반대급부로 저성장, 고실업, 고물가의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헝가리 제1의 부호인 데미안 샨도르 트리그라니트 그룹 회장은 "헝가리 경제는 2002년까지 옛 공산주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발전했었지만 포퓰리스트들이 집권한 뒤 사회복지를 내세우며 공무원 등 근로자 임금을 40-50% 인상했다. 그건 바로 빚잔치로 이어졌고 헝가리는 1등에서 꼴찌로 전락했다"며 헝가리야말로 잘못된 정치의 희생양이라고 지적했다.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진 헝가리 국민과 정부 관료들의 해이해진 의식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헝가리 국민은 1989년 이후 서방으로부터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는 발 빠르게 받아들였지만 정작 오랜 세월 정부가 제공해온 사회주의식의 무상 의료.교육의 혜택은 당연시해왔고, 이는 총선 때마다 선심성 공약들을 양산해왔다.

   인근 슬로바키아가 2003년 일찌감치 의료 개혁을 통해 재정 안정을 도모, 2009년 1월부터 슬로베니아에 이어 동유럽 국가 중에서는 두 번째로 유로존(유로화 사용국)에 가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외국기업 유치에서도 최근 수년간 헝가리는 주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에 주도권을 빼앗겨왔는데 이는 대형 외국 기업들이 경제활동에 하는데 필요한 각종 세제, 보조금 혜택 등에서 상대적인 열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를 대로 오른 근로자 임금에다 비싼 세금, 정부의 관료주의적 행정에 외국기업들은 헝가리 진출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헝가리 정부는 뒤늦게 법인세 인하 등으로 만회를 꾀했지만 덩치가 큰 주요 자동차 메이커와 부품업체들을 이미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선택한 뒤였다.

   시장조사기관인 Gfk가 지난해 5월 헝가리 국민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62%가 '공산주의가 붕괴되기 이전'(카다르 야노시 정권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대답한 것은 충격적이다.

   동유럽에서 시장경제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헝가리인들이 공산주의를 가장 그리워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탈진 상태에 빠진 헝가리 경제와 사회의 현주소다.

   그러나 섣부른 낙관이 금물이듯이 뜻있는 지식인들은 비관 역시 경계하고 있다.

   오랜 세월 전쟁과 피지배의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도 독립과 자존을 지켜온 헝가리인들이 언젠가는 '중.동유럽 허브'의 꿈을 이룰 기회를 현실화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애써 위안을 삼고자 하는 말만은 아니다.

   헝가리는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지적 수준, 우수한 노동력을 갖춘데다 추락하는 경제에 둔감했던 위기 의식도 최근 서서히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 엘테 대학의 한 교수는 "늘 앞서가던 헝가리가 디폴트 위기에 빠진 가운데 뒤에 따라오던 슬로바키아가 헝가리보다 먼저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많은 헝가리인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며 "지금은 위기를 반전시킬 국민적 단합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