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비봉면 구포리는 서해의 큰 포구로 이름을 날리던 마을이다. 옛 수원의 중심지가 지금의 융릉과 건릉 일대에 자리잡았던 1789년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새 수원이 건설될 때에도 바다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세울 때 수많은 목재가 뗏목으로 들어와 구포의 치목소(治木所·제재소)에서 다듬어져 공사장으로 운송됐고, 축성에 필요한 각종 잡물들도 이 물길로 들어왔으며, 심지어 소먹이용 겨까지도 운반해 온 물목이었다. 그만큼 주민의 피해도 컸던 듯 구포 주민에게는 수원에서 열린 무과 과거에서 특혜를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수원에 가장 가까운 포구로 역할을 감당했던 곳이다.
그러나 1994년, 6년 반 동안의 공사 끝에 시화방조제가 완성되고는 포구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지금의 동화천 주변에 형성된 갯벌에는 논이 만들어졌는데 이전에는 상류 쪽으로는 논이, 하류 쪽으로는 갯벌과 염전이 펼쳐진 곳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배가 드나들던 포구는 지금의 야목교 부근인데 고깃배며 새우젓배 등이 드나들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비봉에서 안산으로 가는 39번 도로의 야목교 바로 옆은 주막자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토종닭 요리 전문점이 되었다.
# 구포는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중심지
구포리는 옛 지명에서 '鳩浦'를 쓰기도 했고 또 '鷗浦'로 쓰기도 했다. 전자가 비둘기를 의미하고 후자는 갈매기를 뜻하는데 의미로 본다면 비둘기보다는 갈매기가 맞을 터이다. 그러나 '비둘기 구'자로 표현할 때는 구미(鳩尾)라는 뜻으로 썼을 확률이 높다. 구미는 명치나 명문(命門)을 의미하므로 인체의 급소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이는 땅이름에서 지형상의 요처를 내포한다고 하겠다. '구미'는 또 고유어로서 굽이진 지형을 뜻하기도 한다. 구포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굿개'가 되는데 두 의미의 구미개가 굿개가 되고 이내 구포가 된 것이 아닐까?
구포리의 지형상의 요처는 다양하게 드러났다. 우선 서해안 고속도로의 비봉 나들목이 들어서서 화성이며 수원으로의 관문을 승계했고, 바닷가를 끼고 돌던 옛 수인선 협궤열차의 철로도 구포를 지났으며 다시 수인전철 예정지로 오롯이 쓰일 것이다. 또 수원과 남양을 잇는 도로가 넓게 확장되었고 서평택에서 안산으로 가는 도로도 시원스레 뻗었으며, 동화천 상류로 조금만 올라가면 경부고속철도 또한 휙휙 지나가니 더 큰 요처가 그 어디이랴!
# 구포에 뿌리내린 의병장 우성전과 실학자 우하영
동화천 상류 매송면 원평리에는 단양 우씨 우성전(禹性傳·1542~1593)과 우하영(禹夏永·1741~1812)의 묘역이 고속철도를 굽어본다. 퇴계 이황의 제자이면서 임진왜란 때 추의군을 이끈 의병장으로 이름 난 우성전은 구포 주변에 거주하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수원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서애 유성룡과는 동갑에 동문에서 수학했으므로 각별한 사이였는데 임진왜란을 극복한 점도 공통점이다. 다만 우성전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병을 얻어 돌아오다가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또 우성전의 후손(7세손)이면서 실학자인 우하영은 정조 시대 이곳에 거주하면서 구포로 들어오는 화성 성역의 물자를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고 인근 안산에 살았던 성호 이익의 실학을 한 층 더 발전시킨 인물 아닌가? 농업과 상공업·역사·지리·풍속·토지제도·환곡·군제 및 군정·관방·화폐제도 등 모든 분야의 경험을 앞세워 개혁사상과 견해가 담긴 대작을 남겼다. 바로 '천일록(千一錄)'이다. 그리고 시무책인 '수원유생우하영경륜'을 남겼으며 지방사적(地方史的) 관점에서 18세기 말 화성의 축조와 행정개편을 다룬 '관수만록'도 저술했다. 12차례에 걸쳐 과거에 낙방했지만 자신의 참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학자가 바로 우하영이다. 그 바탕에는 애국과 애민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탓이다.
우하영이 살았던 마을 주변에는 간간이 남은 옛 수인선의 협궤 철로와 가정집으로 사용하는 옛 어천역 역사가 지난 시대를 증언한다. 철로가 지나던 길에 아직도 남은 '우선멈춤' 표지가 금방이라도 꼬마 열차를 통행시킬 것 같은 느낌이다.
# 시간이 멈춘 구포1리 경로당에서
구포 1리 경로당은 요즘 보기 어려운 소박한 모습이어서 오히려 정감이 간다. 경로당 안에는 20여 명의 노인들이 오락을 즐기며 봄을 기다린다. 권병운(79) 노인은 구포리의 성씨 분포를 말해주었는데 안동 권씨가 많고 다음은 광주 안씨이며 전주 이씨와 다른 성씨들이 고루 살아간다고 하였다. 권씨의 마을 입향은 500여년 전으로 추정되고 안씨는 350여년 전으로 추정된다. 안씨의 입향조로 알려진 안헌징(安獻徵·1600~1674)은 이곳 구포(鷗浦)를 호로 쓸 정도로 마을을 사랑한 듯하다. 1621년(광해군 1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과 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냈다. 또 1626년(인조 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장령, 승지 등을 거쳐 관찰사에 이르렀고 예조판서를 증직으로 받았다. 문장에 뛰어나 '구포집'을 남겼는데 목판본이다.
또 실향민인 윤금혁(88) 할머니는 아들을 원하는 부모의 소원에 따라 자신은 남자이름이라면서 마을 노인들이 모두 모여 같이 점심을 해먹는다고 했다. 그래도 활동력이 좋은 신참 노인들이 밥과 반찬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쑥스러운 듯 웃는다.
# 벽해와 갯벌은 염전과 들판으로, 다시 아파트 숲으로
구포리는 퇴락해가는 마을처럼 느껴진다. 아직은 새싹이 돋지 않는 황량한 철이기도 하지만 대규모 택지개발지구로 묶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건축이나 개발이 정지된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오죽했으면 최근의 연쇄살인범이 피해자의 유류품을 태운 곳도 이 마을이었을까? 이장을 지냈던 안수환(56)씨는 토지개발공사에서 2012년까지 택지를 조성한다면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개발을 하려면 계획대로 빨리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야지 지금은 죽도 밥도 아닌 상태라서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경로당의 소박한 모습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그래도 아직은 주민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다. 논과 밭의 비율이 7대 3정도인데 한동안은 축산 농가가 늘어나다가 이제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배나무 과수원에서는 봄 4월에 배꽃축제를 열고 가을 10월에
는 배따기축제도 열어서 주변 도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길이 많아 접근성이 좋으므로 참여율도 높은 편이다. 또한 한 축산 농가에서는 밀크스쿨도 운영한다. 우유 짜기부터 치즈를 만들어 보는 등 쉽게 접하지 못하는 체험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상생을 모색하는 것이다.
바다와 갯벌과 포구로 이름을 높였던 구포리가 드넓은 들판으로 변했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아파트 숲으로 변할 것이다. 불과 30여 년 동안에 일어나는 변화일 터이니 최근 30년의 변화가 이전 수백 년의 변화보다 더 크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