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안천과 서하리전경. 칠사산을 병풍삼아 경안천이 휘돌아 나가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명당중의 명당 광주 서하리. 일제 강점기의 광복운동과 건국초기 우리 정치사에 큰획을 그었던 해공 신익희선생을 배출한 서하리는 상수원보호구역과 그린벨트라는 제재속에서도 밝은 내일을 키워 나가고 있다.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서하리는 338번 지방도를 따라 경안동에서 퇴촌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서하교 좌측에 위치한 초월읍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서하(西霞)'라는 지명은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확인된다. 문구 자체로는 '칠사산(七寺山·364m) 서쪽 방향의 아름다운 노을'이란 뜻이지만,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면 '경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안개가 자주 끼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서하동의 일부는 현재의 서하리로, 또 다른 일부가 무갑리로 통합된 사실을 제외하면 수백년 동안 그 땅에 그 지명이 고스란히 유지된 셈이다.

가구수는 2009년 현재 주민등록상 100여 호가 넘지만 실제는 80여 호에 달한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에 종사하고, 외관도 농촌의 모습을 온전히 지켜왔다. 현대 들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광주 전체 상황을 고려하면 개발바람에서 비켜서 있는 곳이다. 칠사산의 끝자락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팔당호의 상류 방향으로 경안천이 휘돌아 감싸안은, 한마디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명당 중의 명당이다.

# 작지만 큰 마을, 사마루의 어제와 오늘

▲ 신익희 선생의 환국제일성.
이곳에는 사마루(四馬樓)와 안골(安谷),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주민 대부분은 사마루에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고려 말에 충신 4명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돌아보니 마치 누각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졌다. 이곳에 처음 입향(入鄕)한 성씨는 창녕조씨, 전주이씨 등이고 이후 차례대로 여러 성씨가 들어왔지만, 이서용 이장에 따르면 "예전부터 고만고만한 성씨가 다양하게 모여사는 각성받이 마을"이었다고 한다.

최근 몇 십년 사이에 마을 구성원들의 전출입이 신도시개발 만큼이나 잦았다. 토박이만 살던 마을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90년대 초중반으로 수서지구와 인근 하남시의 개발로 창우리 출신 주민들이 이곳에 속속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서하리 전체의 농사는 시설농업(비닐하우스 재배)으로 대변된다. 서하리 경로당 총무 이규원(74)씨에 의하면, 사마루의 너른 들판에 토마토를 비롯해 아욱, 오이, 상추, 치커리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출하되고 있다. 특히 '광주 토마토'하면 퇴촌면 정지리 일대의 토마토 축제로 대변되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관내에서 처음으로 토마토를 재배했던 곳이며 산출량도 여전히 많다고 한다.

토박이 문화를 지켜오던 이곳에 인근 지역민들이 다수 유입되면서 새로운 공동체 문화가 움트고 있다. 사마루의 어제를 기억하는 인근 하번천리 출신인 손종해(51)씨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이틀이 멀다하고 마을 앞 경안천변으로 원정와서 친구들과 천렵(川獵)과 함께 멱 감던 시절의 추억 한마당에 빠져들곤 한다. 고향 땅을 업 삼아, 베개 삼아 지켜온 주민 모두는 상수원보호구역에다 그린벨트 등의 조치로 재산권 행사는 물론 생활상 불편이 적지 않지만, 비닐하우스 속 영글어가는 희망과 내일이란 열매를 꿈꾸고 있다.

#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의 발자취는 과거 아닌 현재 진행형

▲ 신익희 선생 생가.
이제 '서하리의 큰 어른'으로 칭송받는 이 지면의 실제 주인공을 소개할 시간이다. 평산신씨(平山申氏)인 해공 신익희(1892~1956)는 이승만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에 걸쳐 우익측 주요 인사 중 한명이었다. 해공의 주요 이력만을 살펴보면, 당시로는 드물게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을 경험했고,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임시정부 참여, 1948년 제헌국회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당선, 국회의장 역임, 그리고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자유당 이승만 후보와 맞서 호남 유세 도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숨을 거뒀다.

▲ 마을입구 표지석과 특산물 조형탑.
다시 광주 중심의 시각으로 이력을 재구성해보면 서하리 사마루 출신, 남한산초등학교 재학, 광주에서 국회의원 당선,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사망할 때까지 수시로 광주 관내 곳곳과 고향을 찾은 '광주가 낳은 큰 인물'로 요약된다. 그의 자취는 서하리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海公路'라는 도로 표지판, 마을 입구에 세워진 동상, '경기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된 마을 한 가운데에 위치한 생가와 비석, 그리고 생가 건물 뒤쪽 마당에 해공의 다양한 이력과 활동을 알 수 있는 비석군도 늘어서 있다.

▲ 서하리 마을회관.
필자는 업무상 70대를 넘긴 광주 토박이를 대상으로 자료 및 구술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 과정에서 '광주가 낳은 인물' 또는 '서하리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마디로 해공 신익희임을 누차 확인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해공의 정치활동과 광주 방문시 다양한 일화를 기억하고 있는 인사들이 상당수였다. 석경징(75) 서울대 명예교수와 남재호(68) 문화원 부원장 등 관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와 선후배 모임에서 확인되는 해공과 관련된 회고담이 그것이다. 중앙 무대의 사교문화에 익숙했을 그가 고향에 찾
▲ 서하리 장승군.
아올 때면, 남들 눈높이에 맞춰 논밭에 풀썩 앉아 막걸리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켜던 소탈한 인간성과 대인의 풍모를 기억하는 인사 또한 많다. 오랫동안 문화재 실무를 맡고 있는 강민수 팀장의 "해공 생가에 쏟아부은 제 발품과 손때가 언젠가 그리울 것 같다"라는 언급에서도 시의 문화재 정책에서 차지하는 해공의 무게감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마을 주민의 삶 가운데에서도, 토박이들의 회고담에서도, 그리고 시의 문화정책에서도 서울 수유리 묘역에 묻힌 해공이 2009년 현실 속에 뚜벅뚜벅 걸어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배산임수의 명당 중 명당임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해공이 태어나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현재 시의 행정을 책임진 시장도 '작지만 큰'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 마을 속 씨줄과 날줄의 의미

산을 뒤로 하고 눈앞에 강이 펼쳐진 곳이 서하리 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마을 옆을 유유히 흐르는 경안천을 뒤로하고 오늘의 수확물인 몇 장의 흑백사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얀 연기를 공간에 내뿜는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저녁놀 일몰의 풍광이 펼쳐진다.

마을 방문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조사를 통해 몇 백년 이어온 전통의 깊이와 넓이를 다 알 수 있다는 과신은 말 그대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칠사산과 경안천이 빚어 놓은 이 터전과 과거부터 현재까지 누적된 삶의 의미를 몇 장의 문서, 사진 그리고 몇 마디 주고받는 인터뷰 내용에 다 담을 수 있을까 말이다. 다만 1950년 봄 초월초등학교 졸업식 때 해공이 찾아와 인사했던 그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는 70대 중반의 토박이의 말과 눈빛 속에서, 역사는 완료형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다.

지방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로서 현지조사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는 시사편찬위 사무실로 돌아가 오늘 조사한 내용을 업무일지에 기록할 시간이다. 몰고 간 차량을 뒤로 하고 잠시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규모도 크지 않고 인구수도 얼마 안 되지만, 그 안에 펼쳐진 역사의 씨줄과 날줄의 의미가
이토록 클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주혁 광주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