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리는 외부에서 불어닥친 산업화·도시화라는 '광풍' 앞에 옛 전통을 보전하고 지키려는 내부의 '미풍'이 공존하는 장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그 현장을 입체적으로 그려보자.
# 두월마을의 터줏대감
신월리에는 각 마을을 대표하는 성씨가 있다. 1리 두월마을에 광주이씨(廣州李氏)·여흥민씨(驪興閔氏)·전주이씨(全州李氏), 2리 신단마을에 밀양박씨(密陽朴氏), 3리 탄동에 인동장씨(仁同張氏)가 그것이다. 이 중 광주이씨는 현재 23대(약 450년 이상), 여흥민씨는 15대(300년), 전주이씨는 8대(150년) 정도 이어져 왔다. 토박이인 이동희(69)씨에 의하면, 두월마을은 100여 호에 달하지만 원주민 호수는 약 40호이고, 2·3리는 각각 30호 정도이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농촌이었으나, 도시화·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현재 모습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각 성씨도 큰 집성촌이 아니라 7∼10호 정도가 세거하면서 그 명맥만을 유지하는 셈이다.
주요 성씨 가운데서도 광주이씨 석탄공파(石灘公派)의 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씨의 고향'이라는 책에 의하면, 광주이씨가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8개 성씨 중에 중대동 텃골의 안정복(安鼎福)으로 대변되는 안씨(安氏)와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성씨임을 알 수 있다. 광주이씨는 다시 둔촌공파(성남)와 함께 고려 유신인 이양중(李養中)을 중시조로 한 석탄공파로 나누어진다. 이병덕(73) 마을 노인회장은 중시조의 묘역이 원래 하남시 덕풍동에 있다가 20여 년 전 조선중기부터 묘역이 조성되었던 두월마을로 옮겨졌고, 고덕재(高德齋)도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이후 조선전기에 크게 현달한 인물로 정국공신(靖國功臣)과 좌찬성에 이른 한산군(漢山君) 이손(李蓀)의 사패지가 마을 전체에 분포했음도 알려준다. 2리에는 밀양박씨 묘역이 있고, 3리에는 옥산부원군 장돈(張暾)을 모신 옥산사(玉山祠)가 있다.
# 웅숭깊은 공동체 문화
# 마을 전체에 자리잡은 '신월공단'과 '코리안드림'
신월리를 처음 찾은 사람은 마을 입구부터 길게 늘어선 공장단지에 눈길이 갈 것이다. 인근 지월리·용수리에 걸쳐 중소공장이 폭넓게 분포하며 관내에서도 비교적 큰 규모이다. 이곳을 '신월공단'이라고 부른다. 공단 내 생산품으로는 유리, 매트, 정수기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양계장과 논밭이었던 땅에 공장이 빠르게 들어섰다. 개발과 산업화의 바람은 마을지도를 크게 바꾸었고, 마을 안쪽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아무 공장이나 방문하면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노동자를 쉽게 볼 수 있으며, 마을 곳곳을 활보하는 행렬은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최근 한국사회 내부, 특히 농촌에는 다문화가정이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농촌에서 시작돼, 이제는 수도권 도농복합지역까지 확산됐다. 사회단체인 씨알여성회에 따르면 "2007년 기준 관내에는 결혼귀화자 304명, 국적미취득자 595명, 다문화 자녀가 329명에 달한다"고 한다. 두월마을에도 두 가구가 확인되며, 이 일대 공장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 노동자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 마을 변화를 보는 시각
앞서 무갑산 설화, 광주이씨 묘역을 비롯한 전통문화 현장, '신월공단' 조성, '코리안드림'과 관련된 스토리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다. 한마디로 온고지신(溫故知新)과 개발논리, 농촌과 도시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충돌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자기 질끈 메고 논두렁길을 따라 10리 떨어진 학교를 걸어 다녔던 50대 이후의 정서, 영화 '워낭소리'에서 보이듯이 자식을 위해 평생 땅을 일구고 가꾼 70∼80대 농부의 삶, 외지로 나간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민자들의 삶과 시각 모두가 함께 진행형인 마을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공장 때문에 동네 버렸어'라는 토박이들의 '푸념 아닌 푸념'도 있다.
전통문화를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더라도 마을의 냉정한 현 주소는 '이제 자식들에게 조상 이야기를 가급적 꺼내지 않는 분위기'가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대라는 시간과 공간이 마을의 생활상을 규정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는 현장이 극단으로 치닫는 이질(異質)의 방향으로 나갈지 아니면 조화(調和)로 귀결될지는, 개발과 자연환경을 보는 정책방향과 함께 그 내부의 구성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따로국밥은 각각의 다양한 재료와 양념이 합쳐져 사람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내용물로 승화하듯이, 부조화를 극복하고 '대동(大同)'의 공동체 문화로 귀결되기를.
마을조사를 마치고 1998년 봄, 신월리에 묻히신 장인께 북어와 청하 한잔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전통문화에 방점을 두고 살아가면서도 현대의 무한경쟁에 떠밀려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글/ 주혁 광주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jooh44@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