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량리마을 전경. 자채방아마을과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천시 군량리는 어린시절 향수를 그려볼 수 있는 아늑한 농촌마을이었다. 조용한 시골마을이 한 출향인사의 애향심으로 군량리의 특성을 살린 녹색농촌마을로 변신, 2002년에는 농촌테마마을 제1호로 지정되었다. 향수가 담긴 소박한 정을 바탕으로 한 군량리 농촌마을의 지속적인 성공을 기대해 본다.
# 넓은 들 동쪽끝으로 양화천이 감돌아 드는 곳

자채방아마을 이천 대월면 군량리는 마을 앞을 양화천이 감돌아 흐르는 아늑한 농촌마을이다. 마치 정지
용 시의 한 구절처럼 어린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마국산에서 발원한 양화천을 끼고 김안제들을 비롯한 넓은 들판이 펼쳐있어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쌀은 우리 민족의 주식이며 피와 살이다. 이천은 예부터 쌀이 유명한 고장이었다.

'광주 분원 사기방아, 여주 이천 자채방아'라는 민요의 구절처럼 품질 좋기로 이름난 이천쌀의 대명사가 자채쌀이었다. 음력 삼월 삼짇날을 전후해서 씨를 뿌려, 칠월 칠석 무렵이면 거두는 올 벼의 한 품종이었던 자채는, 조선 성종때 강희맹이 지은 농서인 '금양잡록'에 처음 이름이 보인다. 19세기 초반에 나온 '행포지'에는 '이천과 여주 사이의 비옥한 땅에서 잘된다'고 했으니, 예부터 자채의 주산지가 이천지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마을환영 벼 모자이크.

밥맛이 유별나게 좋아서 진상미로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다는 자채는, 그러나 수확량이 보잘 것 없고 재배 방법도 까다로웠다. 결국은 60년대 후반에 당시 군사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다수확 신품종 장려에 밀려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자채벼는 멸종되었지만 지금도 이천쌀은 우리네 식탁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일등미로 대접받고 있다.

자채방아마을의 원래 이름은 '군들'이다. 이 마을이 지난 2002년에 농촌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자채방아마을이란 새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군량리는 옛날 자채벼를 심고 가꾸면서 불렀던 일노래인 '자채농요'가 잘 보존돼 내려온 곳이기도 하다.

▲ 군량리 마을입구 안내표지.

군들에 대한 어원은 분명치 않지만 '기름진 들'을 뜻하는 우리말로 여겨진다. 군들의 한자 차용어가 군량리(郡梁里)이다. 한자의 뜻을 억지로 풀어서 군의 대들보같은 마을이라느니, 군에서 놓은 돌다리가 있었다느니 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이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 이천에서 18년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곳이 군량리라는 주장도 있으나 역시 뚜렷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순천 김씨들의 집성촌, 군량리

▲ 군량리 메타세콰이어 숲길.
군량리에 3개 마을이 있는데 1리가 큰말, 2리가 안골, 3리가 샛말과 뒷말이다. 3리 은행나무골에는 '이사성의 집터'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영조 즉위초 평안병사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 이사성(李思晟)이 살았다는 곳이다. 이사성이 싸리나무로 군사 2만명을 만들어 무술을 가르쳤다는 이마니 고개도 있다.

군량리는 순천 김씨와 이천 서씨들의 집성촌이다. 특히 400여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순천 김씨들이 지금도 전체 가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순천 김씨 군량리파의 중시조인 전서공 김을재(金乙財)는 고려조에서 벼슬을 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인물. 단종조의 원로대신으로 계유정난때 희생당한 김종서(金宗瑞), 임란때 충주 달래강 전투에서 순절한 김여물(金汝 山勿) 등이 후손이다. 군량리파 입향조는 중시조의 7세손인 김언신(金彦信)이다.

조선조 후기까지 군량리는 한양에서 충주를 거쳐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영남대로상에 위치해 있어 꼬박꼬박 5일장이 설 만큼 번창했던 곳이었다. 군량장이 읍내장과 함께 이천부의 대표적인 장시로 손꼽혔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초 새로 뚫린 신작로가 마을을 멀리 비켜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조용한 시골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 한 출향인의 고향가꾸기

순천 김씨 문중의 젊은이 하나가 요즈음 대부분의 농촌 청년들처럼 학업과 직장 생활로 인해서 일찍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다. 객지에 살면서 이따금 고향을 찾을 때마다, 자꾸만 변해가는 고향 마을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고향의 정겨운 모습과 미풍양속을 하나라도 더 보존하고 되살리기 위해 김병일(金炳鎰)씨가 고향가꾸기 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1968년부터였다. 김 씨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마을 공동우물과 돌다리를 복원하고 장치기, 씨름터, 연날리기, 달맞이를 하던 자리 등 의미있는 장소마다 표석을 세우고 주변을 정돈했다.

고종과 순종 황제의 국상때 동민들이 모여 곡을 했던 자리에는 망곡대를, 3·1운동때 만세시위를 했던 곳에는 만세탑을 세웠다. 동구에는 군량리 마을의 유래를 새긴 마을비를, 어린이 놀이터에는 어린이헌장비를 본인이 직접 도안하고 설계해서 세워 놓았다. 마을의 이름난 효자 박성윤과 열녀 행주 기씨의 아름다운 행적을 담은 효열비를 건립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기도 했다.

마을 앞 양화천 가에는 무우정(舞雩亭)이라 부르는 아담한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 온다. 태조 이성계의 7세손으로 강원·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이 마을 출신 이성임(李聖任)이란 분이 세운 정자다. 이성임은 용모·가성·언어·필한·문사가 모두 옥처럼 깨끗하다해서 오옥(五玉) 선생이라 불린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후손인 이사성이 역모사건으로 처형되는 바람에, 후손들은 마을을 떠나고 정자도 헐리고 말았다. 김병일 씨는 옛 자리에 무우정을 복원하고 주변을 동민들을 위한 아담한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이처럼 군량리의 역사와 민속, 인물, 기념물 등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20여년간 마을 구석구석에 가꾸고 보존해 놓은 것들이 자그마치 100개소가 넘는다.

조용한 시골이었던 군량리가 마을의 특성을 잘 살린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병일 씨의 뜨거운 애향심과 헌신적인 활동이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 올 가을에는 자채쌀축제 열어

군량리는 2002년에 농촌테마마을 제1호로 지정되면서, 김길재 마을위원장을 중심으로 꾸준히 노력해온 탓에 이천시에서는 부래미 마을과 함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성공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자채방아마을 농촌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 인원은 약 8천명, 올해 1월부터 5월 초까지만도 총 91건에 1천720명이 마을을 다녀갔다.

▲ 농촌체험중 양화천 물놀이.

체험 내용은 딸기따기, 감자캐기, 복숭아따기, 옥수수 따기, 고구마캐기 등의 농사 체험을 중심으로 미꾸라지 잡기, 인절미만들기, 활쏘기, 장치기 놀이, 전통염색체험, 비누만들기 등 다양하다. 농사체험은 계절별로 내용이 달라지는데, 요즈음은 인접지역인 설성면 송계리의 특산물 송골딸기와 연계한 딸기따기 체험이 한창이다. 경운기나 트랙터를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도는 프로그램도 있다.

김길재 위원장은 자채방아마을만이 갖는 특성을 살려 나가기 위해 쌀농사 체험을 중점 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 첫걸음으로 올 가을에 자채쌀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자채쌀축제는 9월 26~27일 양일간 열릴 예정이며, 각종 재래적인 방법과 탈곡기를 이용한 탈곡체험, 떡만들기, 방앗간 체험과 함께 다양한 즐길거리와 공연행사, 캠프 파이어 등이 선보이게 된다.

▲ 딸기따기 체험.

과거의 역대 정권이 부유한 농촌을 만들겠다며 갖가지 정책들을 쏟아냈지만 농촌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서 고향을 지키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농촌체험 프로그램이 도시와 농촌을 연결해 주는 바람직한 발전 모델로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 이인수 /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도시사람들이 돈을 써가면서 농촌 체험을 하는데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 농촌에는 아직도 도시에서는 찾기 힘든 따듯하고 소박한 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채쌀의 본고장이던 군량리가 쌀농사를 중심으로한 농촌 체험마을로 앞날의 좌표를 설정한 것은 마을의 장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글/이인수 이천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