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군 능현리는 마을이름보다는 명성황후 생가로 유명한 곳이다. 능현리는 1985년 여주군에 의해 성역화가 이루어지면서 25가구가 집단이주하는 등 외형적인 변화를 가졌다. 문화유적관련 개발규제의 어려움을 분담했던 능현리에 요즈음 새바람이 일고 있다. 능현리 주민이 참여하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이 배정되고 여주관광의 일번지로서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조명되는 가운데 능현리의 발전적 변신이 기대된다.
# 여흥민씨와 능현리(陵峴里)
▲ 명성황후 생가 방문객.
영동고속도로 여주 IC를 나와 시내 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 사거리 오른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명성황후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여주가 명성황후의 고장이며,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생가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명성황후가 태어난 능현리는 섬락리(蟾樂里)라 불렸다. 명성황후 6대조인 민유중(閔維重)의 묘소가 금섬망월형(金蟾望月形)이라는 명당이어서 동네이름이 섬락리가 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민유중의 묘에서 마주보이는 안산은 아미사(蛾眉砂)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초승달 혹은 눈썹모양의 아미사는 왕비사(王妃砂)라고도 하는데 풍수상으로 안산이 아미사의 형태를 띠면 여자 후손이 귀하게 되거나 왕비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민유중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니 큰아들이 좌참찬 진후(鎭厚)이고 둘째딸이 숙종(肅宗)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다. 진후는 이조판서 익수(翼洙)를 낳고 익수는 대사성 백분(百奮)을 낳고 백분은 이조참판 기현(耆顯)을 낳고 기현은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을 낳았다. 민유중이 죽자 숙종은 장인의 묘를 관리할 수 있도록 묘막을 지어주었고 이후 민유중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능현리에서 살게 됐다. 민치록은 스승인 오희상(吳熙常)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후사를 두지 못하였다. 해주 오씨와 사별한 민치록은 1851년 9월 25일 두 번째 부인인 한산 이씨(뒤에 한창부부인)에게서 명성황후를 보게 된다.
▲ 명성황후 생가.
# 명성황후와 관련된 기억들
능현리에는 명성황후의 어릴 적 이야기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다. 불과 150년 전의 이야기이므로 꽤 신빙성이 있을 듯싶다. 명성황후는 무척 영리했다고 한다. 한번 본 책이나 사람을 잊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내는 솜씨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딸에게 아버지 민치록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 주었고 많은 독서를 통해 식견을 갖추게 된 명성황후는 고종을 도와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명성황후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머리를 땋아 댕기를 매고, 들에 나가 새를 쫓던 소녀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마을 토박이 민경진(54)씨가 자신의 할머니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좀 더 구체적이다. 어느 날 명성황후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동네 우물가로 갔다. 저녁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려던 어머니를 따라 나선 길이었다. 우물가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물을 긷기도 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여인이 저녁거리로 좁쌀을 씻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린 명성황후가 이를 보고 '나도 이 좁쌀 만큼이나 많은 노비를 데리고 살아봤으면…'하고 뇌까렸다고 한다. 역사가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듯이 명성황후는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궁궐에 난입한 일본인들에 의해 칼로 무참히 시해당했으며 시신은 불태워졌다. 뼈마저 태워 없애버리기 위해 일본인들은 장작 위에 기름까지 들이부었다. 이날 이후 능현리의 여흥 민씨들은 제사상에 기름으로 지져 만드는 전을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참혹한 죽음이 연상되어서일 것이다.
▲ 민유중 선생 묘.
# 능현리의 변화
명성황후 생가와 그 주변의 성역화가 결정되면서 능현리는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변화의 시작은 1985년에 있었다. 여주군이 민상기(작고)씨가 살고 있던 명성황후 생가를 매입, 복원하고 3만3천여㎡의 부지를 조성해 기념관과 문예관, 연못과 주차장 등을 건립했다. 이 과정에서 25호의 가구가 마을 앞 개울 건너편으로 집단 이주해야하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역화의 백미는 감고당(感古堂)의 이건(移建)일 것이다. 서울 안국동에 있었던 감고당은 인현왕후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서인으로 폐해졌다가 5년 뒤 복위되어 궁궐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던 집이다. 당호는 영조(英祖)가 직접 짓고 써서 내려준 뒤 새겨 걸게 하였는데 영조 자신과 자신의 생모에 대한 인현왕후의 도타운 보살핌에 대한 고마움의 발로였다고 실록에 기록돼있다. 1858년을 전후해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사 온 명성황후도 이 감고당에서 살았다.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할머니 인현왕후로부터 옥규(玉圭)를 받는 꿈을 꾸고 이듬해 고종의 왕비로 간택됐다. 덕성여고 운동장에 있던 감고당은 1966년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서울시교육청이 쌍문고등학교 신축을 계획하면서 헐릴 위기에 처해졌으나 여주군의 적극적인 의지표명으로 옮겨올 수 있게 됐다. 뮤지컬과 드라마를 통해 명성황후의 생애가 재조명되면서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부각되는 요즈음, 명성황후의 체취가 서려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 황후의 생가 옆에 자리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닐 듯싶다.
▲ 감고당은 명성황후가 8세때 한양으로 올라간 후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머무른 곳으로 철거위기에 놓인 것을 여주군이 성역화사업으로 옮겨 짓게 된 것이다.
# 능현리의 미래
연중 관람객이 30만을 웃돌고 있는 명성황후 생가와 능현리에 새바람이 일고 있다. 여주 관광의 일번지로서 새로운 역할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야심차게 기획해 공모한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길에 여주 '여강길'이 전국 7개 시범길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제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한강의 유장함과 여주문화의 그윽함을 세상에 자랑할 날이 온 것이다. 그 여강길의 출발점이 바로 능현리이고 명성황후 생가다. 신바람 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지난 4월 노동부가 주관하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사업에 (사)명성황후 기념사업회가 26명의 일자리를 배정받았다. 앞으로 3년 동안 국가의 지원 속에서 스스로 이익을 창출하면서 사회적 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될 이 사업의 무대가 명성황후생가이며 참여자가 능현리 주민이라는 점이 지역사회의 관심과 주민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명성황후 기념사업회 김덕배(80)회장이 밝힌 계획에 의하면 명성황후 생가 내에 있는 5채의 민가에서는 먹거리, 볼거리, 체험거리들이 다채롭게 펼쳐지며, 감고당에서는 품격있는 명성황후 리더십 교육과 예절교육이 진행될 예정이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여주군과 여주 예술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약속받는 한편 여주대학, 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중앙연구원 등과의 지원협약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문화유적과 유적지 주변마을이 개발제한이라는 규제 속에서 침체를 거듭해왔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밝고 확실한 미래를 기약하며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능현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조성문 / 여주문화원 사무국장
1910년 조선이 멸망했다. 내년은 그 치욕의 날로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사실 조선이 멸망하기 15년 전에 명성황후의 시해가 있었고 그로부터 조선은 급속하게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 비슷하게 되풀이된다고 한다. 명성황후와 생가가 단지 지나간 인물이나 한 시대의 유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과거를 반성하고 역사적 교훈을 이끌어내는 단초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명성황후 생가를 감싸고 있는 능현리의 미래도 필연적으로 이에 연동된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