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골골마다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수녀회 피정의 집, 스승예수의 제자수녀회 피정의 집, 성 바오로딸 수녀회 분원, 장애인들의 쉼터인 라파엘의 집, 여러 개의 천주교 신자 집단 거주지 등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영혼의 피난처, 구원의 기도처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도전리의 지명은 도성촌(道城村)·탑전동(塔前洞)·원심이(遠深)·전거론리(全巨論里)로 불리는 4개의 자연부락 중 도성촌과 전거론리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 여주 천주교회의 초기 전래지
도전리를 소개하면서 천주교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1801년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한창이던 때, 조정의 관리로 있던 정도마가 동생과 처 그리고 두 아들 등의 식솔을 거느리고 양평 양동(楊東)을 거쳐 원주 구제(지정면 판대리)에 정착했다.

화전을 일구며 생활하던 정도마 형제는 어느 날 장에 다녀오던 길에 천주교도를 밀고하는 밀정을 만나 부득이 형제가 헤어지게 됐다. 그해 여름에 나졸들이 정도마를 잡으러 나타나자 정도마는 급히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집에 남아있던 그의 처 임가타리나는 "내가 천주학을 하니 나를 잡아가라"며 남편 대신 붙잡혀 순교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정도마는 작은 아들만을 데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원심이로 숨어들었다. 원심이에서의 첫날, 정도마는 바위 위에서 기도를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둥글게 이어진 줄처럼 생긴 묵주를 쥐고 기도했다고 하여 그 바위를 '줄바위'라고 불렀고 지금껏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정도마의 작은 아들은 성장해 3형제를 두었으며 관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가의 성을 따라 전주 이씨로 변성명을 하고 살았다. 이들 3형제 중 둘째 재영(아오스딩)이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인 원심이공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성품이 너그러웠고 겸손했던 그는 항상 마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농토 개간과 농사짓는 법을 보급하여 추앙을 받았다. 이재영 회장이 죽자 강천면에서는 원심이 개발공로자인 그에게 장례지를 제공하고 9일장을 치르게 했다. 이 회장 임종 당시 허리에 새끼를 두른 것이 발견되었는데 예수의 생애를 상징하듯 33마디로 매듭지어진 새끼줄이었다. 이 새끼줄을 평생토록 맨 허리에 두르고 지낸 탓에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길이 들어있었으므로 보는 이마다 그의 놀라운 신심에 깊이 감격하였다고 한다. 현재 원심이·중평동·도성촌 주민의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인 까닭도 이런 힘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 천주교와 동학의 만남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내걸은 동학도들은 서학인 천주교에 배타적이었다. 그러나 도전리에서 만난 동학과 천주교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전주화약(全州和約) 실패 이후 관군에게 쫓기던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1897년 가을, 가족과 제자들을 거느리고 천주교의 영역이라 할 도전리로 피신해 들어왔다. 약 5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둘째 아들 성봉(聖鳳)을 낳고,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원리를 설법하며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 이천식천이란 하늘로써 하늘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다. 이는 온 우주생명이 전체를 잘살게 하기 위해 서로 같은 무리는 서로 힘을 합하며 돕고 서로 다른 무리는 유기적으로 먹고 이용해 보다 나은 생명으로 진화, 발전케 하는 것을 말한다. 설사병으로 고생하며 도전리에 머물던 해월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가히 있을 때에 한 어린이가 나막신을 신고 빠르게 앞을 지나가니 그 소리 땅을 울리어 놀라서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 어린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프더라'고 말했었노라.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
급격한 땅의 울림에 가슴이 아프고 그 땅을 어머니의 살같이 느끼는 해월에게는 이미 땅과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요, 그런즉 자연과 내가 하나이며 생명과 무생명이 하나였다. 한울을 공경하고(敬天), 사람을 공경하고(敬人), 사물을 공경하는(敬物) 일은 궁극적으로 나를 공경하는(敬吾) 일이다. 모두가 '나'인 세상에서, 내가 나를 공경하는 세상에서 증오와 갈등은 없다. 세상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오로지 '사랑'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천주교가 동학이 비록 대척점에 서있다 하더라도 미워할 수 없었을 것이니, 100년 전 도전리에서 있었던 천주교와 동학의 만남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웠다.

#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
도전리는 물이 맑고 숲이 우거져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 도전리가 요즘 개발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기업의 장묘단지사업 계획, 마을을 가로지르는 원심천 정비 계획에 이어 마을 상수원이 있는 곰돌골에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선다하여 주민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제2영동고속도로 착공, 중앙선 전철 복선화, 양동으로 이어지는 황골터널 개통 등 주변 교통여건의 개선은 개발업자들의 투기 바람을 부추기고 있어 주민들을 더욱 불안케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마을 주민들은 사유지인 마을 안길을 폐쇄해서라도 곰돌골 개발을 막자고 결의한 바 있다.

"현재 산지전용허가를 받은 일부 면적에서 사업이 시작되면 조만간 그 위쪽에 있는 수십만㎡의 사유지 개발 요구가 이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마을 이장 강인택씨는 반문하고 있다.
개발과 보전의 논리는 늘 상충한다. 도전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복잡한 생활속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에게 돌아갈 고향은, 언제고 가서 안길 어머니의 품은 늘 그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 드물게 옛 모습을 간직하면서 종교적 영성의 향기를 더해가는 도전리에서, 우리가 그래왔듯이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도 영혼의 안식과 구원의 확신을 오래도록 얻어가기를 희망한다.

글/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