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미동거리 전경. 소설 '원미동사람들'의 무대로 더 많이 알려진 부천시 원미동. 부천시로 승격되기 전에는 조종리(조마루)로 불렸다. 한때는 부천시청이 자리해 부천행정의 중심역할도 했으나 수도권 어느 곳보다도 다세대와 다가구 주택이 밀집되어 있고 그래서인지 골목 골목마다 수도권 소시민의 삶이 배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원미동은 1980년대 수도권 소시민의 삶을 다룬 소설 '원미동사람들'의 무대로 알려진 곳이다. 1973년 7월 1일 부천시 승격과 더불어 원미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 이곳은 '조종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토박이들은 '조마루'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조마루사거리, 조마루삼거리, 조마루 경로당, 그리고 꽤 알려진 감자탕집 간판이 옛 이름을 알려준다. 두 번째로 원미동을 찾은 날, 필자는 조마루의 유래를 알고 싶어 제일 먼저 조마루 경로당에 찾아가 보았다. 담소와 화투놀이로 바쁜 노인들 사이에서 토박이를 찾지는 못했으나 19살에 이곳 전주 이씨 집안에 시집 와서 63년을 살았다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10원짜리 화투놀이에 몰두하던 할머니는 이것저것 알고픈 필자의 바람과는 달리, 긴 물음에 "조씨가 원래 조마루, 여기를 개통을 했대"라는 짧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토박이들은 마을 뒷산 즉, 원미산을 '멀미'라고 불렀다는 말을 덧붙였다.

▲ 소설 '원미동 사람들' 등장인물 동판, 경옥이, 은혜할머니, 으악새 할아버지, 여류작가, 진만이, 주씨 아저씨, 소라엄마(왼쪽부터).

이곳이 왜 조마루라는 이름을 얻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할머니의 말처럼 조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여 조마루로 불렸다거나, 마루란 꼭대기, 으뜸, 높은 것 등을 뜻하므로 큰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렸다는 해석이 전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멀 원(遠)' '아름다울 미(美)'를 사용한 것은 '멀미' 혹은 '멀뫼'라는 우리말 이름을 일제강점기에 한자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리 되었다고 전한다.

▲ 원미종합시장. 원미동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에 전통재래시장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곳이다.

# 개구리주차장, 사과나무골목, 시장통

경로당에서 나와 왕복 2차로에 불과한 원미로를 걷다 보니 좁은 도로 양편이 한쪽 바퀴를 인도에 걸친 채 주차된 차량들로 가득했다. 소위 개구리주차로 불리는 주차 방식이다. 이러한 주차 방식이 없었다면, 주차전쟁이 이곳 주민들의 중요한 일상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나는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개구리주차를 허용했고, 그 이름마저 '개구리주차장'으로 부른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개구리주차장을 지나서 원미산 방향의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낮은 건물들 사이로 중동신도시의 아파트단지와 높다란 주상복합빌딩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세대와 다가구 주택으로 가득한 기존 시가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발길을 골목 안으로 옮겼다. 사방으로 이어진 좁은 골목 중에는 폭 1m 남짓한 것도 있고, 그보다 좀 더 넓은 것도 있다. 그리고 그 골목들에는 이런 이름이 붙어 있다. 능금1골목, 능금1샛길, 사과나무골목, 사과나무샛길. 그 골목 한편에는 구판장 간판을 단 구멍가게도 보인다. 이런 이름들 하나하나가 지나가는 이방인에게 정겨움을 자아내었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과 샛길을 거닐다 다시 원미로쪽으로 내려와 시장통으로 들어섰다. 원미동에는 재래시장이 두 곳 있는데, 그 중 하나는 1985년 개설된 원미1동의 원미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 개설된 원미2동의 부흥시장이다.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둔 두 시장의 끝에서 끝까지 길이를 지도상에서 재어 보니 450여m에 달한다. 그 규모가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시민들의 거주지라는 원미동의 특성 때문일까? 다행히 이곳의 두 시장은 다른 시장들에 비해서 활성화된 듯 보였다. 처음 이곳을 찾던 날 들렀던, 젊은 사장의 족발집도 장사가 잘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장을 볼 시간대여서 그랬는지, 많은 사람과 그들이 자아내는 소란스러움으로 시장다운 맛이 났다.

▲ 부천만화산업종합지원센터.

# 서울·강남 : 행복·써니·우리

원미구청 정문 오른쪽 담장에는 소설 '원미동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경옥이, 으악새 할아버지, 은혜할머니, 소라엄마 등 일곱 인물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담장을 따라가면 라면상자를 든 형제슈퍼의 김반장,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몽달씨, 우직스럽게 땅을 고집하는 사람답게 삽을 든 강노인이 조형물이 되어 소설 밖 세상으로 나와 있다. 그 주변 가로등에도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이 들어 있다. 2003년에 설치된 '원미동사람들의 거리' 풍경이다. 그 거리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그네들을 반긴다.

▲ 원미동사람들의 거리 조형물.

소설 속 배경이 된 1980년대 부천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자면, 서울 '특별시민'의 삶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난 이들이 잠시 머무는 도시, 혹은 그러한 삶에 동화되지 못한 채 서울을 떠나온 소시민들의 도시로 표현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원미동이라는 공간에서 소사역을 거쳐 서울로 출퇴근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그들은 원미동이라는 공간에서 웃고 울고 다투며 함께하는 삶을, 그리고 행복을 꿈꾼다. 서울(미용실)·강남(부동산) : 행복(사진관)·써니(전자)·우리(정육점). 그 이름에서 1980년대 원미동의 정체성을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소설 속 무대는 어디쯤일까 궁금해진다. 원미구청에서 원미시장을 방향으로 원미동사람들의 거리 표지판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그 표지판은 왼편 골목을 가리킨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원미동 64번지 일대다. 그곳을 바라보며 소설 속 모습을 찾아보고자 하나, 몇 해 전 촬영된 어느 사진에서 보이던 2층 연립주택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장터 객줏집의 국자' 모양이었다던 소설 속 무대는 이제 여느 골목의 모습으로 변한 채 남아 있다.

▲ 원미동사람들의 소설무대 동판.

# '경축' 조합 설립, '반대' 조합 설립

소설의 영향 때문일까? 원미동의 이미지에서 1980년대 상황은 지금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원미동은 20여년 가까이 부천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원미구청이 된 옛 시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미구청 앞 도로 이름이 중앙로인 점도 우연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원미동과 그 주변에는 주요 시설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시립중앙도서관이 있는가 하면, 어린이교통나라가 있다. 그리고 이들 시설 바로 옆 춘의동의 시립종합운동장에는 놀이동산을 비롯해서 만화박물관, 활박물관, 유럽자기박물관, 수석박물관, 교육박물관, 교육체험교육관이 있으니 원미동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기 좋은 곳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도시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적지 않은 노후 주택과 비좁은 골목, 협소한 주차 공간 등으로 인해 이곳의 주거 환경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런 이곳에서도 재개발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골목마다 '경축 주택재개발정비사업추진위원회 설립 승인'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나부끼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조합 설립 반대를 알리는 벽보가 붙어 있다. 이처럼 찬성과 반대 의견의 대립은 다가구와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곳, 세입자의 비중이 높은 곳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들에 대한 뚜렷한 대책 없이 개발이 진행됨으로써 벌어지는 일들이다.

소설 원미동사람들 중 '멀고 아름다운 동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희망이란, 특히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란 집과 같은 뜻이었다." 그 희망은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을 터다. 20년도 더 된 소설 속 희망이라는 구절은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이들에게 동일하게 남아 있다. 앞으로 진행될 개발 사업들이 그러한 희망을 어느 정도 실현시켜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글/이상열 군포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