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동 전경. 광주시 장지동은 50여년전만 해도 남한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수리안전답과 넓은 들로 광주시를 대표하는 농업의 중심지였다. 개발의 광풍으로 3개의 굵직한 국도와 지방도가 마을을 갈라 놓았지만 절대농지덕(?)에 나름대로 역사의 향기를 간직해 온 곳이다. 성남~장호원간 국도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광주시 장지동은 광남동에 속한 6개 법정동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앞가지(前枝里)·뒷가지(後枝里)·담안(墻內洞)·절골(寺洞) 등 4개의 구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이 크게 개편되면서 마을 이름에서 '장'과 '지'를 따서 장지리(墻枝里)로 통합,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지리적으로는 직리천과 중대천이 나란히 흐르다가 경안천과 만나는 3번 국도와 43·45번 국도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며, 뒤로는 남한산에서 뻗어온 낮은 산줄기가 포근하게 감싼 배산임수의 남향이다. 그간의 개발때문에 좌청룡·우백호의 날개가 없어진지 오래고, 동 전체를 가로지르는 '성남~장호원' 국도 공사를 비롯해 마을은 '언제나 공사중'이다.

도농복합지역이 그렇듯이 이 마을 역시 역사 향기 가득한 전통문화의 흔적과 산업화·도시화의 행보가 공존해 있다. 다양한 세거성씨의 사례, 마을신앙 및 놀이, 다양한 문화유적, 도로망과 신축 건물로 대변되는 개발 바람 등 과거와 현재, 보존과 개혁이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급하게 충돌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 숨어 있는 전통문화

산업화·도시화가 대세라 하더라도 마을 안쪽을 살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경안중학교 뒤쪽에는 구석기 유적을, 담안에는 고인돌과 동래정씨 사당과 묘역을, 태봉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태를 묻은 곳 등 다양한 문화유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다. 마을의 기원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세거성씨로는, 절골에 고령박씨를 비롯하여 한산이씨·함양박씨·전주이씨, 앞가지에 광주안씨·밀양박씨·의령남씨·이천서씨, 뒷가지와 담안에 동래정씨 등이 꼽힌다. 특히 동의 중심 마을인 앞가지와 뒷가지는 '형제 마을'로, 두 마을 주민들은 마을 동산 밤나무에 올라 밤을 따거나 다양한 놀이문화를 공유해왔다. 음력 정월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함께 지내는 전통을 이어왔으나, 뒷산 허리가 개발로 절단된 후 그 명맥이 끊겼다.


# 충신 정뇌경과 불천지위

장지동 곳곳에는 조선시대의 왕족에서 문신까지 많은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뒷가지에 묘가 있는 정홍익(鄭弘翼·1571~1626)은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 유배된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났다. 사후 인조로부터 불천지위(不遷之位), 즉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를 하사받았다. 절골 능안이란 지명은 왕족인 창흥군(昌興君)과 관련이 깊다.

필자는 병자호란 당시의 충신 정뇌경의 묘역에 눈길이 갔다. 흔히 병자호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홍익한, 윤집, 오달제로 대변되는 삼학사(三學士)일 것이다. 학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뇌경(鄭雷卿· 1608~1639)은 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운계(雲溪),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가 항복 이후 소현세자를 볼모로 삼자 중국 심양까지 배종신(陪從臣)으로서 수행했다. 1639년 심양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참형을 당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인조는 산소 자리를 하사하여 묘를 쓰게 했는데, 그곳이 현재의 새능이다. 온양정씨 종중에서 묘역을 정비하면서 신도비와 함께 충정사(忠貞祠)를 건립하고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묘역 발굴 당시 나온 지석(誌石)이 그 내용은 물론 양식면에서도 문화재적 가치가 크며, 2008년 광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됐다.

▲ 직리천역보를 증언하는 박광우 광주중앙수리조합 전조합장(左)과 박광운 광주향토문화연구소장.

#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줄다리기

광주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로는 '광지원리 해동화놀이'와 함께 '장지동 앞가지의 줄다리기'를 손꼽는다. 음력 정월이 되면 초승부터 농악을 울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짚과 쌀을 거두어 쌀로는 술을 담그고 짚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보통 2~3일 동안 줄을 꼰다. 줄의 한복판에는 버팀목을 끼워놓는다. 보름날 아침이면 풍성하게 음식을 차리고 마을 곳곳에서 농악을 놀면서 액을 쫓고 복덕(福德)을 기원하고는 지신밟기를 한다. 초저녁에는 달맞이를 하고, 보름달이 중천에 오르면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남녀로 편을 가른 다음에 마을 원로가 징을 세 번 울리면, 북소리에 맞추어 '영차, 영차' 하면서 줄을 당긴다. 승패는 줄 가운데 있는 버팀목이 어느 편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모두 세 번을 당기는데 여자 편이 이기면 보리 풍년이, 남자 편이 이기면 보리 흉년이 든다고 전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밤늦도록 풍악놀이와 함께 술 마시고 춤추고 놀면서 대동놀이를 마무리한다.수 백년의 전통을 이어왔다는 장지동 줄다리기는 현재 시에서 지원하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자리잡았다.

▲ 1933년경에 조성된 驛洑.

# '廣州之農本也'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현재의 장지동은 넓은 농토로 명성이 자자한 농촌마을이다. 농업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수리시설로, 1933년경 조성된 역보(驛洑)가 앞가지 앞 중대천(中垈川)과 직리천(直里川)이 만나는 지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역동 방향으로 이어진 수로를 따라가면, 보 건설을 주도한 김병익(金炳翊)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장지 사거리에 건립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1942)'가 당시 역사를 생생히 말해준다.

▲ 직리천.

앞가지 출신인 박광운(75)씨에 의하면,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농사개량, 생활개선, 문맹퇴치 등을 목표로 한 모범마을로 지정됐다. 해방 이후에는 경기도에서 벌어진 4H운동의 일환으로 '전지 4H 구락부'가 조직돼 청소년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특히 1956년에는 경기도 4H 경진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쳤단다. 수리조합장을 역임한 박광우(72)씨는 1950년대에 광주중앙수리조합이 설립돼 인근 홍중저수지(중대동 소재)를 활용함으로써 일대가 가뭄 걱정이 거의 없는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이었음을 뿌듯해했다. 또한 정부 시책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통일벼 재배 등 미곡 증산에 박차를 가할 때에는 공무원의 상당수가 장지동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광주면에 배당된 쌀 수매량의 3분의2를 충당했다고 한다. 당시 경운기, 탈곡기, 이앙기를 이용한 영농기계화사업도 군 전체에서 가장 먼저 시행될 정도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 음력 정월대보름날 장지동 앞가지에서 줄다리기를 마친 마을사람들이 풍악에 맞춰 대동놀이를 즐기고 있다.

# 비껴갈 수 없는 도시화의 물결

2009년 7월 현재의 장지동은 그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가면 전통문화, 농촌문화, 개발 바람 등이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속히 진행되어 매우 역동적인 변화상을 보여준다. 한편 불과 20년 전만 해도 풍요롭고 넉넉했던 이 마을은 절대농지로 묶여 있어, 중소공장이 속속 들어서 소득이 증대된 준농림지역 마을들에 비해 열악하다. 벼농사가 최근에는 시설농업(비닐하우스)으로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손해 보는 농사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서다.

마을 엿보기를 마치면서 장지동이란 지명에 역사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장'은 전통과 현대,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담이고, '지'는 그 모든 것을 연결하고 뻗어가려는 가지, 즉 담을 넘어서 또 다른 담을 잇고 소통하려는 몸짓으로 말이다. 연일 터져 나오는 우리 사회 내부의 문제점은 조그마한 소통의 장에서 그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음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 충정사.

사진//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글// 주혁 광주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