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심에 포위되어 섬처럼 떠있는 소래포구.
# 꼬마기차

"색소폰 소리보다 더 깊은 폐부에서 울려오는 듯한 경적 소리, 잘가락 잘가락 밟히는 바퀴 소리, 그리고 갓 출가하여 여대생 티가 가시지 않은 채 팔뚝에 연비자국이 아직 아물지 않은 수해 스님을 태워 보내기 위해 어느 날 새벽 별을 보며 배웅 나갔던 여섯시 반의 이른 새벽 열차…."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 속에서 그려지는 열차의 모습은 애잔하다. 1970년대 말쯤이었다. 송도역에서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에 처음 가 본 것이. 열차는 장난감 열차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작은 열차를 '꼬마기차'라 불렀다. 그때는 송도에서 수원까지 46.9㎞의 노선만 살아 있었다. 송도에서 출발한 기차는 남동, 소래, 달월, 군자, 원곡, 고잔, 일리, 사리, 야목, 어천을 거쳐 종착역인 수원역에 도착했다. 협궤 열차가 사라지기 전, 인천에 살았던 사람 중 꼬마 기차에 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수인선 철도는 일반 철길 폭의 절반 밖에 안 되는 폭 72.6㎝의 협궤 철로였다. 마주 앉은 승객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로 객차 안은 좁았다. 협궤열차는 문학과 방송, 영화 등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유명세를 탔고 덩달아 소래포구의 명성을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바람이 제법 거세다. 이제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래철교에는 난간이 설치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건너다닌다. 철로가 있던 자리에는 포장마차와 식당과 난전이 들어섰다. 거기서 사람들은 한 잔에 천 원짜리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전어 구이를 먹고, 호떡과 국화빵, 마른 새우와 멸치를 사간다. 생굴무침과 바지락을 팔러 나온 행상들, 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시금치, 고추, 알타리무를 들고 나온 할머니들도 있다. 철로에서 마시는 막걸리 맛은 각별하지만 나는 여전히 협궤열차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소래포구는 협궤열차 때문에 생긴 포구였다. 소래포구가 생기기 전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시흥시 포동의 새우개포구로 드나들었다. 1907년 일제는 주안에 시험용 염전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전통 자염(煮鹽) 생산지였던 주안, 남동, 소래, 군자 등지에 대규모 천일염전 단지를 만들었다. 1935년, 일제는 그곳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인천항으로 반출하기 위해 수인선 철도를 깔았다. 거기서 나온 수익은 조선총독부의 자금줄이 됐다. 해방 후에도 호황을 누리던 염전은 1980년대 중국산 소금의 유입으로 값이 폭락하면서 폐염전이 됐다. 수인선 철도는 천일염뿐만 아니라 쌀과 광물자원까지 반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경동철도선의 일부였다. 일제하에서 수탈의 길이었던 수인선이 해방 후에는 철로 변 주민과 학생들의 고마운 발이 돼 주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자동차도로의 확장에 따라 철도 이용객 수가 급감했다. 협궤열차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다 몇 번의 노선 단축 끝에 1995년 12월 31일 운행을 영원히 정지했다.

▲ 구 소래역에서 포구로 가는 길목.

# 포구로 가는 길

협궤열차가 멈추면서 소래역도 사라졌다. 소래역이 있던 자리는 버스 종점이다. 21번, 27번, 32번, 38번, 754번 버스들이 인천과 소래 사이를 왕래한다. 종점에 도착한 시내버스는 잠깐의 휴식 뒤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버스종점 주변에는 상가가 많지 않다. 2008년 가을, 종점 슈퍼도 문을 닫았다. 버드나무 아래서는 할머니 한 분이 끝물 고추를 따가지고 나와 관광객들에게 판매중이다. 종점 근처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원주민이지만 할머니는 소래포구가 번성한 덕을 크게 보지 못했다. 농사만 지어온 탓이다. 소래포구의 오래된 옛집들 일부는 주변의 새로 생긴 고층 아파트 단지 사이에 섬처럼 떠 있다.

할머니는 연거푸 "고추 사가세요. 고추 사가세요" 사정하지만 시든 고추를 사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노인 한 분이 천원어치 한 바구니 갈아준다. 할머니는 그 노인이 고맙다. "아저씨, 맛있게 잡숫고 건강하소." 팔순의 할머니는 자꾸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고맙수다. 고맙수다." 같은 돈이지만 돈이 흔한 포구의 어시장이나 횟집들과 돈의 가치가 이렇듯 다르다. 소래포구 안길의 시작은 원주민 공인중개사 앞부터다. 길 휴게실은 문을 닫은 지 오래고 그 옆 왕대포집에서는 막걸리 한 사발에 천 원씩이다. 왕대포집 앞 은행나무 아래 할머니 한 분이 굴을 까고 있다. 노인은 보리와 검은콩, 생강 따위도 놓고 팔지만 손님은 드물다. 오른쪽 빈 터에서는 소래포구 회 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소래버스 종점에서 소래포구로 들어가는 길목은 온통 기계음으로 요란하다. 아직도 신축 중인 공사장이 사방에 널렸다. 이미 아파트단지와 대형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는 더 이상 시골 동네가 아니다. 소래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은 포구 부둣가와 물양장(物揚場)뿐이다. 건너 월곶에도 신도시가 들어섰다. 포구 또한 신도시 속의 섬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소래에, 마지막 남은 섬에 닿고 싶어 밀물처럼 몰려든다. 만조가 되었던 사람의 물결은 밤이 깊어서야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본격적인 어시장 상권의 시작은 충청도 횟집부터다. 생선구이와 새우튀김, 오징어 튀김, 잔술로 파는 막걸리와 돼지 껍데기 등이 횟집 앞 좌판에 나와 있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인하기 위한 먹거리들. 수족관 앞에는 조개구이용 조개들이 접시 가득 담겨서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건어물 상점 좌판에는 한치와 쥐포, 멸치, 홍합, 문어포, 오징어채, 건새우, 돌김, 북어포 등이 나와 있지만 소래산 건어물은 새우뿐이다. 옹진횟집, 칡즙가게, 옷가게, 그 옆은 결성 건어물이다. 결성 건어물 한편에는 마른 생선을 파는 노부부가 있다. 상가 건물 중간 중간에는 굴과 바지락, 꼬막을 파는 노점이 있고 간장게장과 굴 무침을 파는 좌판이 손님을 부른다. 대복횟집, 소래바다횟집, 중앙횟집, 호남횟집, 광성회센터 등이 이어진다. 이들은 큰 도로변에 대형 횟집들이 들어서기 전에 생긴 소래포구 1세대 횟집들이다. 어물뿐만 아니라 쑥개떡과 감자떡을 파는 수레에도 손님이 기웃거리고 찐빵 가게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글·사진/강제윤 (시인·'섬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