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리마을 전경. 여강 옛길의 중심인 아홉사리길이 있고 남한강과 청미천이 만나 선사시대부터 오랜 터전을 일궈온 아름다운 마을, 여주군 점동면 도리는 마을을 설명하는 수식어들이 많은 곳이다. 마을 전면으로 치악산 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보인다.
# 도리(道里)의 유래

[경인일보=]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과 안성에서 흘러온 청미천이 만나는 곳에 아담한 마을 도리가 있다. 도리는 되래, 새말, 사장골 등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마을 이름의 유래로는 마을 바깥 쪽 도호동(桃湖洞) 사람들이 옮겨와 살았다 하여 도래(桃來)라 부르다가 지금의 큰 마을인 되래가 되었다는
설과 여러 차례의 전란 속에서도 화를 모면했던 경험에서 환란이 되돌아 나간 지역이란 뜻으로 되래라고 하였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곳은 산수가 아름다워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터전임을 말해주듯 강변 경작지에서는 지금도 선사시대 주거지와 유물들이 발견되곤 한다. 마을 동쪽의 신선바위와 서쪽의 아홉사리 길은 한양과 충주를 이어주던 중요 길목이자 절경을 간직한 곳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흥 민씨들의 집성촌인 도리는 50여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지만 느티나무 가지마다 매미소리 요란하고 푸른 들판 가득 벼와 감자, 옥수수가 영글며 맑은 강에선 피라미와 매자가 뛰노는 푸근한 곳이다.

▲ 남한강과 청미천이 합쳐지는 곳으로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때마침 이곳 방문객이 투망질에 한창이다.

# 아홉 굽이 아홉사리 길

도리와 흔암리를 잇는 강변길이 아홉사리다. 좁고 험하며 아홉 굽이를 구불구불 돌아나가게 되어있어 아홉사리란다. 아홉사리 고개에는 매년 9월 9일 아홉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꺾어 달여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서려있다. 아홉사리 고개를 넘다 넘어지면 아홉 번을 굴러야만 살아서 넘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한다. 과객들도 사라지고 주막도 없어진지 오래지만, 배 삯을 아끼려는 사람들이 걸어서 한양으로 오가던 길,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이 길을 400여년 전에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록에 남아있다. 때는 조선 광해군 시절. 서얼을 차별하는 국법에 불만을 품은 이른바 여강칠우(驪江七友)가 여주 땅에 살고 있었다. 태종이 만든 서얼금고법은 양반의 첩자손은 영원히 문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비록 명종 때 양첩의 자손에 한하여 증손자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자격을 주었고 인조 때 천첩의 자손에게도 같은 조건으로 문무과 응시기회를 주었으나 그 정도의 조치로 양반들에 의해 끝없이 양산되는 서자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수는 없었다.

▲ 녹색마을 자연체험동.

여주 강가에 살았던 7명의 서자들은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 목사 서익의 서자 서양갑, 관찰사 심전의 서자 심우영, 선공감제조 박충간의 서자 박치인, 박치의 형제와 북병사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등이다.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자신들과 같은 서자들도 다른 양반자제들과 마찬가지로 관리에 등용시켜줄 것을 호소했다. 아마도 서자인 광해군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기대했던 듯싶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자 세상을 포기하고 여주 내양리 부근에 은둔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이름난 집안의 서자들로 도원결의를 본떠 삶과 죽음을 같이 할 것을 맹세하면서 문예를 배우고 선학에 몰두하는가 하면 병서를 보고 익혔다. 홍길동을 지은 허균, 허균의 스승이자 삼당시인으로 이름높은 이달의 아들 이재영과도 깊은 교분을 맺었다. 여강칠우의 꿈은 허균과 이재영의 꿈이기도 했다. 훗날의 도모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이들은 나무꾼이나 소금장수 또는 노비추쇄인으로 가장하여 화적질에 나서곤 하였다.

▲ 마을입구 장승들.

그러던 1613년(광해군 5) 봄, 장사꾼 하나가 부산 동래에 가서 은을 무역해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문경 새재에서 은 수백냥을 빼앗기고 피살됐다. 여강칠우의 짓이었다. 죽은 사람의 노복 춘상이가 이들의 뒤를 밟아 여주까지 추적하여 거처를 알아낸 뒤 포도청에 고발하니 이들은 즉각 일망타진됐다. 물론 여강칠우와 노복 춘상이가 이용한 길은 아홉사리 길이다. 이 길 말고는 사람의 눈을 피해 여주로 숨어드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광해군 즉위에 공헌한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를 제거하기위해 일으킨 계축옥사의 빌미가 되었고 나중에 인조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단초로 작용하게 된다.

▲ 도리(늘향골)녹색농촌체험마을 캠프장.

#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여강 길

지난 봄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을 대상으로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7곳을 선정하고 사업의 본격 추진을 천명했다. 선정된 곳은 소백산 자락길, 강화도 둘레길, 정약용의 남도유배길, 동해 해안길, 박경리의 토지길,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길, 여강을 따라가는 역사문화 체험길이다. 여강은 여주를 흐르는 남한강의 별칭으로 여강 길은 영월루~은모래 금모래~흔암리 선사유적지~아홉사리 길~도리~삼합리~부론성당~법천사지~흥원창~섬강교~자산~바위늪구비~강천리~목아박물관~신륵사~여주터미널까지의 45㎞ 구간으로 도리와 아홉사리 길이 그 중심에 있다. 앞으로 이 길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 지역의 특화된 주제 발굴 등을 통해 문화적·친환경적인 길로 거듭나게 된다. 남녀노소가 서로 이야기하며 걷는 소통의 길, 치유의 길, 인생을 키우는 길, 재미있는 길로 새롭게 창조된다. 제주 올레길에서 시작된 걷기 열풍은 바야흐로 잠들어 있는 아홉사리의 전설을 깨우고 도리의 미래를 희망으로 채우고 있다.

▲ 아홉사리길. 도리와 흔암리를 잇는 강변길로 아홉구비를 돌아나간다. 실록에도 남아 있는 길로서 여강칠우(驪江七友) 등 각종 설화가 서려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문화생태 탐방로 7곳 중 하나로 도리 주민들이 마을 발전과 연관해 기대를 걸고 있다.

# 늘 고향과 같은 마을 '늘향골'

▲ 민남식 이장
도리의 다른 이름이 늘향골이다. 늘 고향과 같은 마을이고자 늘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민남식(63) 이장은 전한다. 자주 옮겨다니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태어난 곳만이 고향은 아니다. 잠시나마 머물렀던 곳이면 모두 다 고향이다. 도리를 새로운 고향으로 삼고 사는 이들이 있다. 독일에서 일반화 되고 있는 숲 유치원을 세우려는 조영효 경원대 명예교수, 흙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홍일선 시인이 그들이다. 그들은 도리에서 도리 사람들과 함께 또 다른 고향을 만들어가고 있다.

도리는 농림부가 지정한 녹색농촌체험마을이다. 도리가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모성과도 같은 남한강이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고 기름지게 해 심고 가꾸는 작물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각박한 삶을 벗어나 훌쩍 도리에 들어오면 문득 어머니 젖가슴 같은 뭉클한 감동을 느낀다. 봄나물을 캐고, 모내기를 하고, 가재를 잡고, 투망으로 걷어 올린 고기를 끓이며 가마솥 밥을 해먹으면 아련한 고향이 선하게 떠오른다. 썰매를 타고, 새끼를 꼬고, 연을 날리고, 인절미를 만들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도시의 아이들에게도 고향은 하나로 같아진다.

도리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곳을 바라보면 치악산이 있다. 그 푸른빛으로 계절이 열림을 알게 하고, 그 꿋꿋함으로 미래의 희망을 품게 하는 치악산이 있다. 여름이 한창인 도리에서 바라보는 치악산은 여전히 푸르고 꿋꿋하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글/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 sung464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