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만세운동 기념탑과 기념공원.
# 아파트 숲으로 포위될 구래리 마을

[경인일보=]김포시는 지금 혁명(?)을 치르고 있다. 김포시 신도시(약 1천만㎡, 5만4천709세대)와 택지개발로 들어설 아파트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포신도시 중심지로 예정되어 있는 양촌면 구래리 마을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한해가 넘었다. 구래리 마을 뿐만 아니라 구래리와 맞닿아 있는 마산리와 양촌면 소재지 양곡리도 아파트가 들어서는 택지개발이 진행 중이다. 더욱이 면소재지인 양곡리는 뉴타운 개발지역으로 지정돼 양촌면은 그야말로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하는 가히 혁명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양촌면은 김포반도의 정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독특하다. 바로 바다와 강을 끼고 있다는 점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바다와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한강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양촌면을 통과하지 않고는 강화나 김포의 다른 지역인 대곶면, 통진읍, 하성면, 월곶면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

양촌면 구래리 마을은 지리적으로 김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난 95년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검단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구래리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포에서 제일 높은 '수리너머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은 많이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버스가 올라가다 중턱에서 엔진이 꺼져 승객들이 밀고 가야할 만큼 고개가 높았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수리너머 고개에 산적이 있어 20명 이상이 모여야 안심하고 넘을 수 있다하여 '스무너미 고개'라고 했다고 한다.

구래리 마을은 남동쪽으로는 가현산과 필봉산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낮은 구릉지 위에 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가현산을 마주보고 있는 지형적 위치 때문에 많은 등산객과 약수를 마시러 오는 이들이 마을 한복판을 쉴 새 없이 지나쳤었다. 마을이 있던 그 자리는 현재 집들이 모두 사라져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모래 사막처럼 돼버렸다. 그리고 드러난 황토 벌판에 흙을 가득 실은 덤프트럭만이 먼지를 날리며 다니고 있다.

구래리 마을이 법정리로 가장 먼저 등재된 문헌은 광무 3년(1899)에 나온 통진읍지(通津邑誌)로 '양촌면 구래리'가 '상곶면 구래동(九來洞)'으로 표시돼 있고, 조선지지자료에는 구래동 이외에 '구래골'로 기록돼 있다. 마을 이름인 구래리의 '구래'는 '성(城)'의 뜻을 가진 '구루'에서 변천됐다는 지명 학자들의 소견으로 보아 이곳에 성(城)이 존재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이나 조사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 백여년전 퇴역한 내시들이 살았다는 구래리.

# 구래동을 '내시촌'으로 불러요

수리너머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구래동'이라 불렀던 마을이 나타난다. 120여호가 모여 살았으며 여흥 민씨, 경주 이씨, 전씨 등이 10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래동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궁중 내시부에 근무하던 내관들이 퇴직하고 내려와 이 마을에서 살았는데 산수가 좋고, 인심이 후덕해 아홉 번이라도 다시 와서 살고 싶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구래동(九來洞)'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구래동이 '내시촌'으로 불리고 있는데 당시 기거했던 내시는 박낭청, 권낭청, 안낭청 등이다.

구래동에 사는 한규석(72)씨는 "언제인지는 알 수 없는데 구래리 730에 세 사람의 내시 출신들이 기거했는데 이름은 모른다"며 "양자로 들인 후손들이 있었는데 박낭청의 후손은 신모씨고, 안낭청 후손은 민모씨, 권낭청 후손은 권모씨로 두 사람은 김포에 살고 있고, 한 사람은 인천에 산다"고 했다.

"당시 묘비에 '정헌대부행내시동상선승전색겸도절리장공양위지묘'(正憲大夫行內侍洞尙膳丞傳色兼都里張公兩位之墓)라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낭청(당하관의 총칭)들과 관계가 있어 보이지만, 내시들이 언제 이 마을에 내려와 기거한 지는 전해지는 자료나 근거나 없어요. 다만 이곳 사람들은 조선시대 중반으로만 추측할 뿐예요. 아쉬운 것은 산소 앞에 있었던 비석과 기타 석물들, 옛날 고서들이 상당히 많았던 걸로 아는데 후손들이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수집가들에게 팔아넘겼대요."

▲ 김포시 양촌면 구래리와 양곡리 전경. 김포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김포의 대표적인 사통팔달이며, 3·23만세운동으로 김포 주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곳. 그러한 양촌면 구래리와 양곡리가 약 1천만㎡ 5만여세대의 김포신도시 개발로 대변신 중이다.

# 구래동 내시가 곤장 맞은 사연

한규석씨는 구래동 내시촌에 기거하던 내시들이 곤장 맞은 사연을 이어나갔다. "당시에 강화사람이나 김포사람이 한양을 가는 길이 따로 있었습니다. 강화에서 배를 타고 김포 대곶면 신안리 덕포로 건너와서 율생리를 거쳐 양촌면 유현리를 통해서 구래동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구래동에서 지금은 인천으로 편입된 황골로 불렸던 대곡리를 지나 감정동의 옹주물로 나와서 나진교를 지나갔습니다. 지금의 북변동을 거쳐 고촌의 천등고개를 넘어갔지요. 강화사람이 한양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말을 타고 구래동을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내시들이 살고 있는 집 앞길로 지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내시들이 시비를 걸었던 거예요."

한씨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내시들이 권력이 많았잖아요. 한마디로 '감히 내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다니!' 하며 과거보러가던 사람들을 건방지게 봤던 겁니다. 결국 과거 응시생들은 내시들에 의해 말에서 끌어내려지고 마구 구타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광에 가둬지기도 한 거지요. 아마도 내시들이 군기(?)를 단단히 잡고는 돌려보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벌어진 거예요. 과거를 보러가던 사람이 과거는커녕 그야말로 몰골이 말이 아닌 채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집안에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부터다. 당시 김포지역에서는 내시촌이 두 곳 있었다고 한다. 한 곳은 양촌면의 구래동이고, 다른 한 곳은 하성면 전류리 포구에 있었는데 전류리 포구에서 생활하던 내시들이 구래동 내시들보다 출신 계급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당시 양촌면 구래동 내시들에게 구타를 당한 집안이 하성면 전류리 내시에게 이 사건을 알리게 된 거지요. 시쳇말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래동 내시들을 혼내달라는 청원을 했겠지요. 전류리 내시들은 즉시 이 사건의 주인공들을 호출해서 사건 전모를 확인하고, 구타사건의 주동자인 구래동 내시들을 곤장으로 군기(?)를 잡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내용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내가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들은 내용입니다."

▲ 3·23만세운동 기념관 부지.

# 3·1만세 함성 울렸던 오라니장터

구래동 마을을 지나 면소재지 양곡리와 맞닿아 있는 오라니 마을이 있다. 이곳은 180호의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특히 오라니마을은 경기도 서부지역에서 큰 규모의 5일장이 섰던 오라니장터가 있다. 마을 촌로가 전해주는 오라니장은 보부상들이 많이 모였던 곳으로 근대에 들어서는 우시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곳 오라니장에서 전개된 3·23 만세운동 시위는 양촌면민 뿐만아니라 김포에서 자랑스러워하고 김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 김천길 김포문화원 향토사료위원
오라니장은 헌종8년(1842) 통진읍지의 시장 편에 '오라시장'으로 기록돼 있다. 오라니장터는 양곡리 면소재지로 진입하기 직전 오른쪽 소로를 따라 약 100m 가면 왼쪽으로 오라니 마을이 나타나고 마을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약 300m를 더 진행하면 가현산 방향의 언덕배기의 구릉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오라니장터'였던 지점이다.

1919년 3월 23일 이곳 오라니장터에서 누산리 출신 박충서 외 6명과 대곶면 율생리 출신 임철모 외 1인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주창하는 3·1만세운동 시위를 전개했던 역사적인 장소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천길(74) 김포문화원 향토사료위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예요. 장터에서 수백 명이 만세를 외치고 했는데, 헌병과 경찰들이 주동자를 붙잡아 갔답니다.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이 도망을 가기도 했지만, 주재소에 갇혀있던 주동자를 석방하라고 주재소에 다시 모여서 다음날 아침까지 주재소를 포위하고, 요즘말로 하면 야간시위를 전개했답니다. 물론 나중에 다 진압됐지만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죽도록 고생을 했대요. 순사들이 개개인의 집으로까지 찾아가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색출, 마구 패고 잡아가고 했는데 나중에 풀려나기도 했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대요."

▲ 3·23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 오라니장터.

오라니장터의 3·23 만세운동은 이후 지역주민들의 정신적 기둥이 됐고 이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져 오라니장터는 양곡시내로 옮겨졌으나 원래의 장터는 택지개발로 사라져 영원히 우리의 기억으로만 자리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포시가 뒤늦게 나마 오라니장터였던 곳을 택지개발 지구내 공원구역으로 지정하고 3·1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갈 '독립기념관'을 세운다는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글/김진수 김포문화원 부원장·mr@gimp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