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곳


그렇게 버들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학교가 보인다. 덕산초등학교 대장분교다. 서울시와의 경계에, 인구 87만여 명의 도시이자 이렇다 할 농어촌지대도 없는 부천시에 분교라니 조금은 의외다. 2층 건물인 본관에 부속건물이 딸린 대장분교는 여느 시골마을의 작은 학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현재 이 학교에는 5학급에 14명의 학생이 다니고 3명의 교직원이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 개교한 지 50여 년이 되어 가는 이 학교는 1997년에 덕산초등학교에 병합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이었으나 진학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줄면서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도 교직원 1인당 학생 수가 5명이 채 못 되고 각종 교육시설도 잘 갖추었으니 어느 사립학교 부럽지 않을 만하다고 한다.

# 대장들을 황금들판으로 바꾸어 준 '대부둑'
대장분교를 지나 마을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세느 강변'이라고 이름 붙은 한 음식점 간판이 눈에 띈다. 그 옆 수로와 그곳에 가지를 늘어뜨린 채 흔들리는 버들의 모습에서 이런 이름을 연상한 듯한데, 이유야 어쨌든 그러한 풍경들이 정겹다. 그 음식점 주인이 센강을 연상한 듯한 수로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이 손맛 보기에 바쁘고, 간간이 그러한 모습을 화폭이나 사진 속에 담는 이들도 이곳을 즐겨 찾는다.
이 수로를 둘러싼 둑은 '대부둑'으로 불리는데, 363만㎡ 에 달한다는 마을 앞 넓은 들을 옥토로 만든 주인공이다. 이 둑은 일제가 중국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 대장동 일대의 굴포천 물이 서해 조수의 영향을 받아 농업용수로는 부적절했기에 한강 물을 끌어들여 들판에 공급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대부둑과 수로가 지닌 농업용수 공급 및 홍수 조절 기능은 1973년에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에 신곡양배수장이 설치되면서 보다 안정화됐다. 이 둑이 없었고 양수·배수시설이 좋지 못했던 시절에는 지금과 같은 넓은 황금들판을 보기는 어려웠다.

이 곳에서 만난 김광옥(91)옹은 수해가 잦았다고 했다. "그전에는 툭허면 물 끼고(홍수가 나고) 그냥, 저 아래 끄트머리 논 옆의 집들은 물이 거기 죄 올라오는 거야. 그래 학교로 들어가야 돼. 거기 들어가서 모면해야 돼. 거긴 높거든."
대장동 일대가 수해를 자주 입던 곳임은 이곳의 마을 중 하나인 섬말의 지명유래에서도 드러난다. 대장동은 조선시대에는 부평에, 일제강점기에는 부천에 속했다. 그리고 부천이 시로 승격한 1973년부터 김포에 잠시 속했다가 1975년에 다시 부천에 속하게 됐다. 본래 큰말, 섬말, 세집매, 한다리 등 네 마을로 이뤄졌으나, 세집매와 한다리는 혐오시설로 분류되는 생활폐기물소각장과 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서면서 사라지고 이제는 큰말과 섬말만이 남았다. 그중 섬말은 서해 조수가 마을을 통과했고, 홍수가 나면 그곳만 남고 주변이 물에 잠겨 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 김포비행장, 그리고 한국전쟁
대장동을 이야기할 때, 떼어놓을 수 없는 곳중 하나가 김포공항이다. 일제는 1939년부터 김포에 비행장 건설을 시작해 1942년에 완공했고, 그곳을 군용비행장과 카미카제 특공대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관문이었던 김포공항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부천역에서 중동과 오정동을 거쳐 지금은 주민이 모두 떠나간 오쇠동을 지나 비행장으로 이어지는 국방도로도 만들어졌고, 도로 옆으로는 소사역에서 비행장까지 화물을 수송할 철도도 놓였다.

이러한 공사에는 수많은 사람이 동원됐다. 경기도 일대를 다니며 나이 드신 분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삶을 묻노라면, 김포비행장 공사에 동원되었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이들 공사에 대장동 주민도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대장동 토박이 김광옥옹은 그런 세월의 흐름을 묵묵히 지켜보며 살아왔다. 그의 기억에는 많은 사람이 수레에 흙과 돌을 실어 나르던 모습, 철로를 따라 물자가 이동하던 모습이 선하다.
광복 후로는 미군이 김포비행장을 관리하며 사용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비행장의 기능을 마비시키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전쟁 초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다. 그렇기에 비행장 옆에 위치하고 서해안에서도 멀지 않은 대장동이 전쟁의 참화를 비껴가기는 어려웠다. 전쟁을 피해 피란하던 주민들이 폭격에 맞아 죽고, 집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파괴됐다. 물론 비행장을 방어하려는 군인들도 적아 구분 없이 대규모로 전사했음은 물론이다. 대장분교 옆 야트막한 언덕 주위에 당시 시체를 묻은 무덤이 즐비했다고 하니 주민들이 입었을 피해는 능히 짐작할 만하다.

# 주민들의 작은 바람들
대장동은 오랫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집을 고치기조차 어려웠다. 이곳의 집들과 마을길의 풍경이 1970년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주민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비록 각종 물건을 트럭에 싣고 골목 안까지 드나드는 상인이 있고, 슈퍼라는 이름이 무색한 구멍가게도 두세 곳 있고, 버스도 몇 개 노선이 드나들지만, 주민들이 생필품을 구입하는 일조차 꽤나 시간을 요하고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2008년에 대장동의 일부가 그린벨트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부천시는 이 일대에 차세대 첨단산업단지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고, 최근에는 부천운하 건설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온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밋빛 계획이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그린벨트가 해제돼 증·개축이 용이해졌다는 점 외에는 이러한 계획들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듯하다. 이곳 토박이 박종학(57)씨 같은 이들은 "대장동은 농지가 많고 고도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 그런 장밋빛 계획은 실효성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인근에 생활폐기물소각장과 하수종말처리장으로 인해 개발을 해도 수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천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개발가능지인 대장동에 사는 이들은 거창한 계획보다 진입로를 넓히고 마을로 유입되는 소각장과 하수처리장의 악취를 줄이는, 그런 작은 일부터 이뤄지길 더 바라는 듯하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