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국수에 대한 애정은 놀라울 정도다. 우동이니 소바니 하는 국수가 도시마다 특색 메뉴가 있으며, 지역마다 페스티벌이 있으니 말이다. 우동과 소바가 수백 년 동안 호각지세로 각축을 벌이다가 근자에 한 가지 국수류가 전쟁에 더 끼어들었다. 그게 바로 중화 라멘, 곧 중국식 국수류로 이들 세 가지 국수가 삼족정(三足鼎), 곧 삼국지의 형국을 연출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중화 라멘의 특징이라면 국물을 육류, 특히 돼지뼈로 끓이는 데 있다. 우동과 소바는 쇼유(일본식 간장)에 생선, 곧 멸치나 이른바 가쓰오부시라 일컬어지는 다랑어 말린 놈을 넣어 끓여 국물을 낸 것.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육식은 금기였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의 국수가 일본으로 물을 건너가 중화라멘으로 불리다가 상하이로 물을 건너와서는 일식라면으로 둔갑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국적이 뒤바뀐 것.
메뉴판을 보면서 주문한 것은 이름하여 '五木泡菜燒肉麵'. 우리 김치를 고명으로 얹은 국수다. 나는 면과 돼지고기와 숙주 그리고 김치를 입에 넣으면서 바야흐로 21세기는 음식이 삼국지를 연출하는 세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온 그 국수에 김치가 얹혔으니 명실상부한 삼국 하이브리드다. 하네다~김포~훙차오의 세 공항으로 이어지는 셔틀 노선이야말로 이런 음식 삼국지를 이어주는 길인지도 모른다.
계산을 치르고 나오는데 저쪽으로 이상한 간판이 눈을 찌른다. 烏冬面. 일본어의 うどん(우동)을 중국어로 표기한 이름이다. 그런데 실은 우동이라는 일본어도 중국에서 넘어간 이름의 일본어 표기일 따름이다. 일본의 첫 세대 중국문학자인 靑木正兒 교수의 고찰에 따르면 일본어 우동은 중국어의 웬둔(온)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우동은 중국의 온~일본의 대표 면식 うどん(우동)~중국으로의 재이주 혹은 귀향이 이루어지면서 烏冬面이 된 것이다. 이 烏冬面은 홍콩이나 타이완에 가면 다시 오롱면으로 둔갑한다. 한 가지 더 보태면 그 우동은 한국의 중국음식점으로 이민을 올 때는 전혀 다른 국물이 되었다. 일본식 쇼유로 국물을 낸 것이 아니라 소금으로 간을 해서 맑은 국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2시. 쑤저우로 가기 전 상하이에서 한 군데를 더 찍어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향한 곳은 상하이 구어지판디엔(國際飯店). 구어지판디엔은 뉴욕의 마천루를 본뜬 빌딩으로 지어지던 1934년에는 '극동에서 제일 높은 건물'(遠東第一高樓)이었다. 중국의 민족자본이 힘을 합쳐 지어서 그런지 상하이의 이른바 '영(零)번지'로 건물 피뢰침을 기점으로 하여 상하이시의 좌표계와 도시 계획이 이루어진단다. 그 건물 2층에 푸산(福山), 곧 우리 한반도의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과 같은 동향의 셰프들이 경영하는 펑저로우(豊澤樓)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 프런트에 물어보니 2층을 가리킨다. 2층 식당 안은 이미 오후 3시 무렵이라 텅 비어 있다. 카운터에 가서 한국에서 자장면과 루차이(魯菜)를 취재왔다고 하니 징리(經理-매니저)를 불러준다. 징리는 50대의 여인. 용건을 말하자 반갑게 맞으면서 펑저로우의 내력을 들려준다.
1930년대 당시 구어지판디엔은 도합 여섯 개의 음식점이 들어선, 말하자면 먹자 빌딩이었다. 1층 커피숍, 2층 펑저로우, 3층 서양식 레스토랑, 14층 마찬가지로 서양 식당, 15층 광둥 요리점, 18·19층에는 또 다른 서양식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으니 그야말로 동서 양대 음식의 집합지였던 것. 호텔 건너편은 이른바 빠오마팅(馬廳-경마장)이 있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즐기면서 말들이 달리는 광경을 즐길 수 있었던 말하자면 최고로 전망 좋은 식당건물이었다.
특히 2층의 펑저로우는 베이징 펑저위안의 '장궤'인 루안쉬에탕(欒學堂)이 당시 상하이 영화계를 주름잡던 후디에(胡蝶)의 권유로 차린 음식점이다 보니 유명 배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베이징 경극계의 1인자인 메이란팡(梅蘭芳)도 소련에 가기 전 이곳에 들렀다. 찰리 채플린은 평소 오리고기를 먹지 않았는데(자신의 걸음걸이가 오리걸음이라는 이유로) 이 펑저로우에서 만든 샹수야(香酉禾鴨-오리를 찐 다음 다시 튀긴 요리)를 맛보고는 그야말로 '맛이 가서' 출국하면서 별도로 한 마리를 싸가지고 갔다. 단골손님에는 이런 예술 분야 인사뿐만 아니라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도 기라성같았다. 사대가문의 송쯔웬(宋子文) 쿵샹시(孔祥熙)를 포함하여 쟝지에스(蔣介石) 부부도 단골이어서 쟝지에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은 펑저로우에서 늘 음식을 집으로 시켜먹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 상하이의 첫 시장을 지낸 천이(陳毅)도 회식을 자주 열었단다.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식당 내력의 설명을 끊고 내가 물었다. "말하자면 단골로 국민당과 공산당을 초월한 인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네" 하니 연방 고개를 흔들면서 "뛔이뛔이뛔이"한다. 옳다는 뜻이다. 다시 내가 들고 간 자료를 보여주며 "그 단골 가운데는 임시정부 시절 우리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는데 혹시 관련 자료나 사진이 있는가" 하고 묻자 그건 금시초문이란다. 시계는 4시 무렵. 내가 다시 "자장면을 지금 먹을 수 있냐"고 묻자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이 시각에는 주방에서 불을 꺼서 음식을 만들지 않고 오후 5시에는 가능하다는 것. 5시에는 훙차오 공항에서 쑤저우로 가는 일행과 만나기로 한 시각이다. 자장면 사진은 불을 꺼서 불발인 게다. 다음 기회로 미룰밖에.
나는 훙차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불을 끄다'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옛날처럼 석탄이나 조개탄을 피워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시 가스불을 피울 것이라면 어째서 불을 끈 게 대수인가 하는 물음이